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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엘PD May 25. 2023

[Replay]

스즈메의 문을 통해 본 가정위탁

Replay는 "매체 속 가정위탁을 다시 보다"의 줄임말로, 매체(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에서 비치는 가정위탁의 모습을 통해 가정위탁에 대해 솔직히 리뷰하는 새로운 리뷰 콘텐츠입니다.




오늘 리뷰해 볼 매체는 바로,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최근,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어 신예로 떠오르는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 일본에서 개봉 하루 14만 명을 돌파하며, 연일 흥행하고 있으며, 현시점 3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다. 필자 또한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큰 지진과 그에 이어 쓰나미가 일어났던 일본, 과연 대한민국이 그 정서와 맞닿을 수 있을까? 였다. 많은 학자들은 대한민국도 지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바로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재난, 사고와 같은 것들은 언제 일어날지 예측이 힘들기에 더욱더 두려움에 대상이 되곤 한다. 또한 그 피해 또한 상당히 크게 추산이 되고, 사람들의 목숨이 실낱처럼 흩어지게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 그 안에 떠올리는 목소리처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곳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그 재난으로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 이 영화를 통해 신카이마코토 감독은 명확히 한 가지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어떤 순간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희망, 어떤 상황에는 망상 같은 단어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희망이라는 것은 내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바뀌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영화였다. 오늘 필자는 이 이야기를 '가정위탁아동'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해보려고 한다.





1. '스즈메' 주인공 설정의 특별성

주인공 '스즈메' 스냅샷





주인공인 스즈메는 재난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어, 이모와 함께 사는 친, 인척 가정위탁에 모습으로 설정되었다. 이렇게 자립준비청년들은 다양한 이유로 원가정을 잃게 된다. 필자는 부양자의 이혼과 죽음이었듯 말이다. 그러나, 스즈메는 여느 다르지 않은 아이들과 같이 살아간다. 마음 한편에 다양한 아픔을 품은 채 말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아동인 스즈메의 아픔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픔이 마치 특별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누구나 겪고 있을 수 있는 아픔이고, 결국 치유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그려냄으로써,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 희망의 중심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자연 치유! 이를 심리학에선 "회복탄력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늘 감독이 그린 로드맵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회복탄력성이란? resilience'인 이 회복탄력성은 통상 다양한 시련과 역경, 그리고 실패 등이 주는 좌절감과 무기력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올라가는 이른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2. 모든 것의 첫 시작, 문의 의미

문으로 들어가려는 스냅샷





스즈메에게 "문"은 어떤 의미였을까? 모두 다 허물어진 건물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꿈에서 깨어난 스즈메는 폐허를 찾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나고, 그 위치를 알려준 후,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이내 멈춰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내를 찾아, 그 사내에게 일러준 폐허로 향한 스즈메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낯선 문 하나, 뭔지 모를 문을 열자, 그 안엔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곳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던 돌석상, 그 석상을 뽑아들자, 고양이로 변했고, 이내 놀란 스즈메는 그곳을 벗어나는 회피를 택한다. 뭔가 이상한 상황 가운데, 우리 대다수의 모습은 잠수나 회피의 방식을 택한다. 그렇게 도망을 택한 스즈메는 점심이 되고, 밥을 먹던 중, 기이한 것을 보며 얼굴이 사색이 된다. 그리고 울리는 재난 경보음, 이내 자신에게만 그것이 보임을 알게 된 스즈메는 이내 자신이 갔던 장소, 그 문임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고, 이내 회피했던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만난 사내는 필사적으로 그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있었다. 이내 무엇인지 모를 그 기운은 그 남자를 튕겨내고, 더 필사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 스즈메는 결정했어야 했다. 인생의 어떤 것도 결정해보지 못했을 스즈메는 위험할지도 모를 그 일에 과감히 뛰어든다. 돌아가라는 남자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냐는 남자에게

이 문을 닫아야만 하잖아요

라고 말한다. 이내 문을 닫으며, 스즈메의 문단속 OST 앞부분이 나오며 시작되는 그들의 이야기, 이후 둘은 마을로 내려오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때 스즈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여기서, 문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문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아픔의 시작, 엄마의 죽음 그리고 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려 발버둥 치며 보이는 엄마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 마지막 대사에서 이미 나는 알고 있었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스즈메는 엄마가 이미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정하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 문은 스즈메에게 아픔이자, 회복의 매개체로 사용된다. 문을 닫을 때, 소타가 외우는 주문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많은 장면에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라" 등의 말들이 사용된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그렇게 약속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떠났겠지만, 그날 그 인사는 다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아픔이었지만, 누군가는 떠날 수밖에 없이 버려진 그곳으로 돌아가, 그들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스즈메는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을 것이다.


3. 다양한 재난 피해자와 만남,

    유대, 연결, 협력 = 치유

(1) 치카와 스즈메의 만남

'치카' 스냅샷




처음 소타와 만나고, 배를 타고 건너온 이야자키현 그곳에서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지만, 스즈메는 "방임주의 집안이라 괜찮다"며 둘은 함께 길을 나서게 된다. 이후, 스마트폰을 열고 놀란 스즈메!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를 지닌 다이진은 SNS 인기스타가 되어 있었고, SNS를 통해 다이진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게 된다. 그렇게 추적하다 한 귤 농장으로 가게 된 스즈메는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치카를 도와주며 둘은 친구가 된다. 이후, 스즈메는 다이진의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이내 눈앞에 미미즈가 보이게 된다. 스즈메는 치카에게 혹시 이곳에 폐허가 있냐는 질문을 하고, 치카는 저쪽으로 가며 있다며 알려준다. 이내 그리로 달려가는 스즈메 이때 치카는 달려가고 있는 스즈메를 불러 세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데려다주겠다고 이야기하고는 그 장소에 데려다준다. 이내 내려서 그 장소로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스즈메 그 과정에서 소타는 "이제 됐다며, 친구에게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스즈메는 이내 따라간다. 그리고 의자가 된 소타는 스즈메에게 "너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니?"라고 묻는다. 이때 스즈메는 "두렵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후, 둘은 힘을 합쳐 문을 닫게 되고, 스즈메는 "우리가 해냈어요" 라며 좋아한다. 이 모습을 본 소타 역시 웃으며 좋아한다. 스즈메는 모든 일이 끝나고 치카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때 스즈메는 치카가 사는 삶을 열심히 함께하며 공유한다. 이내 밤이 되고, 나란히 누운 두 소녀는 진실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때 치카는 자신이 그 중학교를 다녔었고, 그 학교 산사태의 피해자임을 밝힌다. 그러자, 스즈메 또한 "나는 이모랑 살고 있어"라고 말하며 이내 머뭇거리는 듯, "이모가 나 때문에.."라는 말을 하며 이모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을 말하게 된다. 이때, 치카는 그런 스즈메에게 "스즈메 뭔진 모르겠지만, 너는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며 위로해 준다. 사실, 스즈메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대해, 가치와 판단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집을 나왔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스즈메에게 치카의 말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치카를 만나, 자신의 아픔을 처음 털어놓았던 스즈메의 모습을 통해, 자조모임에 대한 필요성을 더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달랐던 모습에 때로는 거짓으로 나를 속이기도 하고, 만들어 낼 때도 있었다. 특히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 말이다. 어릴 적 운동회를 할 때, 부모님이 손을 잡고 오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 참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오는 나에게 친구들은 왜 혼자 왔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냥 그렇게 넘어간 줄 알았던 시간은 내 일기장에 이렇게 적혔다 "모두 신났던 하루, 나는 슬펐다"라고 말이다. 이런 필자의 아픔은 자조모임(청년들의 걱정 없는 하루)에 나오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모두 공유되는 일들이었다. 필자와 동갑인 한 친구는 "여기에 오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눈빛만 봐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픔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치유되는 과정인 것 같다.

(2) 루미와 스즈메의 만남

'루미' 스냅샷




루미와 스즈메는 치카의 집을 떠나, 이번엔 TV에 나오는 다이진을 쫓아, 고베로 가는 여정에 만나게 된다. 이때, 급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해, 한 정거장으로 들어가게 된 소타와 스즈메.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의자가 어머니의 유품이니?"라고 묻는다. 그 말에 그렇다고 답하는 스즈메, 이내 빗속에서 차가 서고 둘은 루미를 만나, 고베로 가게 된다. 고베 맥도널드에 도착한 후,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폐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내 갑작스러운 전화와 함께 루미 아이들의 유모가 되게 된다. 이때,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서빙을 도우러 나온 스즈메는 다이진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다시 달려 나간다. 이때, 곧 미미즈가 보이게 되고, 소타와 함께 그 놀이공원으로 달려간다. 이때 소타는 이번엔 반드시 다이진을 잡겠다고 다짐하며 둘이 업무를 분담하고,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생결단의 혈투를 부리며 다시 돌아가라고 다이진에게 이야기하지만, 다이진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 "너는 곧 사라져"라고 말이다. 이때, 미미즈 안 엄마의 형체로 유추되는 사람을 보게 된 스즈메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때 소타는 빠르게 스즈메를 부르고, 달려가며, 둘은 다시 한번 그 문을 닫게 되고, 돌아오게 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매우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아마, 따뜻한 집과 그 안에서 걱정, 그리고 일상 그리고 아픔을 꺼내어 나눌 수 있는 스즈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지친 모습으로 의자와 함께 터덜터덜 돌아온 스즈메에게 루미는 "어디에 다녀온 거냐며" 다그치듯 묻는다. 이때, 옆에 있는 종업원은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죠 뭐.."라고 말하며, 그렇게 지친 스즈메에게 "밥을 먹자"라고 이야기하는 루미, 사실 이게 뭐 그리 특별한 것이냐고 말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정말 필요한 어른, 무엇이든 용납받는 경험이 없는..

자립준비청년들은 비빌 언덕이 없다. 그러니, 늘 눈치를 보고, 나를 내려놓고 남을 더 신경 쓰며 살아가게 된다.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모두 책임져야 하며, 어떤 일에 눈총을 받더라도 온전히 감내해야 하기에 더욱더 나를 숨겨야 하고, 그 안에서 잘못된 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모두 나를 지키는 일련의 삶의 방법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필자 또한 그랬다. 루미와 같이 온전히 나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대해주고, 걱정해 주는 어른을 만나는 것, 그리고 나 존재 자체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자립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른이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었기에, 스스로를 스스로가 엄격히 관리하고, 잣대를 들이밀어, 자책하며 책임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루미를 만난 후, 스토리 라인 내에서 다양한 변화가 보인다. 먼저 스즈메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함께 하자며 의자가 된 소타, 즉 어릴 적 그 아픔이 서려있는 의자를 가지고 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사진도 찍게 된다. 그러면서 질문하는 루미에게 "고베의 추억"이라고 답하는 스즈메, 어쩌면 어린 시절 그 아픔의 상처를 추억으로 받아들이게 된 스즈메를 보여주며 어쩌면 조금씩 소타라는 매개를 활용해 자신의 아픔을 돌보아주고 있는 스즈메의 모습을 보여주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처음에 의자가 아무렇지 않게 방 안에 어지럽혀진 사이에 굴러다니고 있었을까?라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엄마의 유품이라면 아주 소중히 다룰 법도 한데 말이다. 어쩌면 그 의자는 방치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다시 찾았지만, 어떠한 의미 부여도 불가능할 만큼 부서져 있던 의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음, 여기서 필자는 두 가지 양면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의자에 본래 역할은 누군가를 앉혀야 하는 것인데, 의자는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는 의자였다. 그렇지만, 스즈메 마음 한 구석 어머니의 유품, 마치 엄마와 같이 생각되는 동일시와 재난의 아픔, 엄마가 이미 없음을 인지하게 되는 역할을 하는 두 가지의 양면성 그렇기에 이 의자를 가까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것이 루미와의 만남을 통해, 일상을 보내며 나를 나로 보게 되는 과정 가운데 이제는 돌아볼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주 볼 수 없었던 둘(치카의 집)은 마주 보고 이야기하며 그 밤을 지새우고, 같이 잠에 든다.  

(3) 무나카타 소타 ( 살고 싶어 졌어..)

주인공 '무나카다 소타' 스냅샷





무나카타 소타를 처음으로 만났지만, 마지막으로 다루는 이유는 모든 상처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소타를 만난 스즈메는 다양한 환경에 놓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는 서로를 향한 애착이 생기게 된다. 마침내 그 애착은 사랑으로 변화되고, 동시에 그들의 언어가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언어의 변화는 가장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기 좋은 소재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외치던 스즈메와 친구인 세리자와의 말을 통해 자신을 돌보는데 무심했던 무나카타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 “우리는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바뀌는 장면을 통해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자체 내에선 무나카타 소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 정보가 많지만, 여러 장면으로 유추해 보면 소타 또한 재난의 피해자로 재난으로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와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남들에게 되풀이하지 않으려 과업을 물려받아, 여기저기를 다니며 문을 닫는 일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오며 아마도 그가 모든 재앙을 다 막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 곳에도 터 놓을 곳 없던 그 역시 엄청난 아픔과 자책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처음 그 일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스즈메에게 돌아가라고 이야기 한건 아닐까?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쩌면, 삶이라는 것에 대한 허무함과 신의 변덕 사이에서 놀아나는 것이 인간이라는 하찮은 존재임을 몸으로 깨닫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점차 사는 것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모든 것을 짋어지던 한 청년 그러나, 이내 그는 나누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자신보다 어린 스즈메에게 말이다. 나는 스즈메를 처음 본 소타가 물은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니?

어떤 경우에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서 묻지는 않는다. 이내 두 번째 문을 닫을 때도 소타는 동일한 물음으로 스즈메에게 묻는다. 그리고 세 번째 문을 닫을 때 소타는 분업을 선택한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인정과 스즈메에 대한 존중 이제 스즈메는 소타에게 있어서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었고, 이는 그 밤 함께 잠든 소타의 꿈을 통해 증명된다. 그리고 다른 요석을 찾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고 하며 도쿄로 향할 때, 문득 스즈메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신칸센 무지 빠르지 않냐" 혹은 "후지산을 보지 못했다고.." 등이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까지도 보여주는 스즈메의 모습은 루미와의 만남 이후 급가속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에게 어떤 유대 관계가 형성된 걸까? 아마도, 동질감 아닐까. 함께 어떤 중요한 일이나, 자신의 상황을 나눌 수 있다는 그 어떤 힘은 계속해서 그를 성장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 이 글엔 필자의 생각이 들어있어, 종교적일 수 있으므로 불편하시다면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필자가 마침 이 글을 쓰기 전, 대학원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가정위탁과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나의 아이템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숭실대학교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적 기업 석사 학위 중에 있다)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이 마음에 울리는 질문을 한 가지 하셨다. "선생님을 버티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선생님을 행복하게 하는지" 이 두 가의 질문이었다. 필자 또한, 그 원동력에 대해서 집에 차를 몰고 가며 생각을 해봤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해올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의 답은 "하나님"이라는 분 한분이셨다. 이전에 책을 쓸 때도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져도 저는 아마도 걸어가고 있을 겁니다. 그건 저의 힘이 아니라, 저를 살리신 하나님 때문일 겁니다"라고 말이다. 나에게 성장의 원동력이자, 버티게 하는 기둥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정말 완전하신 그분"이기에 달려감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서로의 성장을 경험하고, 마지막 소타가 요석이 되던 순간, 스즈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저 문 너머 요석으로 쓸쓸하게 지키고 있는 소타를 보는 스즈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스즈메는 다시 소타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이제는 나의 사람, 그리고 나의 사랑 소타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하는 스즈메, 그저 재앙이 일어나면 안 되기에,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둘은 이미 우리가 되어, 손을 잡고 함께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게 했다. 마지막 소타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스즈메는 큰 소리로 외친다. "소타가 없는 세상이 더 무섭다고.." 이내 할아버지는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 스즈메는 소타를 구하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어린 시절 자신의 아픔으로 걸어간다. 그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집, 그 여정에서 소타의 친구를 만났고, 이모도 만나게 된다. 이모와의 만남은 뒤에서 다루겠다. 그리고 다이진과 사다이진과 함께 어린 시절 들어갔던 그 문으로 들어가는 스즈메, 그리고 그 안에서 소타를 구해내는 스즈메 그리고 요석이 되길 선택하는 다이진,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건,

여정 중에 만난 좋은 어른 루미와 또래 친구 치카
그리고 스즈메의 결정을 따라주고 지지해 주고 믿어주었던 이모
마지막으로, 스즈메에게 진정한 어른이 되어 준 소타

여정 중에 만난 치카를 통해, 자신의 일에 대한 옮음과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스즈메, 그리고 루미를 통해,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날 용납해 주는 따스한 사랑을 경험했고, 소타를 통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랑을 경험한 것, 이것은 스즈메를 변화시켰다.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계속 조우하고 유대할 진정한 친구를 얻었다"

스즈메를 보면서, 가정위탁 아동들에 전형적인 모습을 참 잘 녹여냈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게 가정의 흡수되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친구들의 관계나 다양한 상황에서 대처를 잘하고, 때로는 애어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편한 사람이나 잘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가끔은 아이 같은 행동을 서슴없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스즈메가 건강하게 해쳐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지만, 소타에게는 신칸센 무지 빠르다, 후지산에서 깨웠어야죠... 등과 같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자조모임 청하(청년들의 걱정 없는 하루)에서 보이는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하루하루 묵묵히 열심히 살다, 한 달에 한번 시간을 가지게 되면, 다양한 이야기가 풀어지고, 동시에 금방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공감대는 "불의한 상황에선 같이 화를 내주고, 힘들 땐 위로를 건네고,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충고는 무례한 충고가 아니라, 정말 삶을 살아보니 그렇더라, 혹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라는 필요한 표적 정보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풀면서 최근 필자와 청하에 같은 나이 또래 친구가 함께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자조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또 한 곳에 모여서 함께 만나 이야기 나누고 밥도 먹으며 게임도 했다. 그러다, 한 친구에게 좋지 않은 전화가 왔고, 상황이 이상한 듯하여 그중에 선배인 친구가 전화 통화를 하러 나갔다. 내용은 그랬다. "알바를 멀리 가게 되었는데, 추워서 입으라고 빌려준 패딩을 돌려주지 못하고 돌아왔고, 그래서 나의 일당으로 패딩값을 퉁치자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분에게 그 패딩은 되게 중요한 유품과도 같은 물품이라 돌려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내 무서웠던 친구가 연락을 회피해 화가 난 상황이었다" 한참 뒤에 돌아온 친구는 직접 자신(선배)이 돌려주러 가기로 했다고 했다. 그곳에 위치는 자그마치 세종시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청하 또래 선배 세 명(필자포함, 2명)과 함께 토요일이니 함께 다녀오자고 했고, 일정이 끝나자마자 너무 피곤했지만, 그렇게 그 후배 집에 들러 패딩을 가지고, 차를 몰고 세종시로 향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까지 했냐고 나무랄 수도 있다. 너를 더 챙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유대관계이고, 함께 하는 방법이었다. 그 구실로 가면서 그 친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약속도 했다. 물론 이행될지는 알 수 없는 약속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손해 라거나, 희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직 어린 동생이 겪게 될 불의한 상황에서 나서주고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 이것 또한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매번 우리가 이렇게 해줄 수 없으니,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러한 유대관계는 그 친구가 다시 꿈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가는 차 안에서 다양한 직업적성검사도 시키고, 이야기를 하면서 치기공을 꿈꾸지만, 고민하는 부분들을 풀어내 대학진학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지금은 상반기 편입에 도전하여 대학을 잘 다니고 있다.

(4) 타마키와의 만남



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엄마를 잃은 스즈메를 키우게 된 이와토 타마키, 갑자기 착하게 잘 지내던 스즈메의 알 수 없는 행적에 매일 밤을 지새우고, 걱정했을 타마키, 그렇게 일도 다 놓은 채 동료를 통해 알게 된 카드 출처를 통해 도쿄로 향한 타마키, 그렇게 역을 나오자마자 보게 된 장면은 지금껏 양육해 왔던 양육자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상황이었음은 틀림없다. 웬 남자의 차에 타고 어딘가로 가려는 상황, 그 가운데 우선은 스즈메를 지지해 주는 타마키, 여기서 필자가 왜 이모가 아닌, 이와토 타마키와의 만남으로 소제목을 정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을 다 희생하고, 결혼마저도 희생하며 이모로서, 양육자로서 살아온 이와토 타마키 가정위탁 가정의 양육자 또한 이러한 모습이다.

이와토 타마키와 같이 삼촌 혹은 이모에게 맡겨지는 경우, 일반가정위탁에 속하며, 친할머니, 외할머니 등 혈족의 경우 대리 가정위탁이라고 칭하고 있다. 현재 일반가정위탁과 대리가정위탁은 가정위탁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10명 중 9명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의 조부모 또한 필자 나이 3살 때부터,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양육을 하셨다. 두 명의 아이를 위해서 거의 평생을 바치셨고, 이 또한 필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극 중 스즈메가 보이는 모습들 특히, 미안해한다거나 혹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책임감을 보이는 대목은 가정위탁 아동들에게서 잘 관찰되는 모습들이다.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들의 힘은 어마무시할 정도로 큼을 느꼈다. 이것은 자립을 할 때, 가정위탁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나타나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이번 연도 초에 자립준비청년 박람회가 있었다. 그곳에 필자는 참여했고, 모든 유형의 자립준비청년들이 모이는 것이었지만, 양육시설이나 혹은 그룹홈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1부가 끝나고, 2부 부스 사업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부스에 가야 할지 고르고 선택하고 있었다. 나는 한 부스에서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조급해 보이는 한두 명의 친구들이 보였다. 여유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해 보였다. 그들에게 이 많은 부스는 선택에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매우 절박해 보였다. 이내 내가 있는 부스로 다가온 친구 줄이 긴 부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곳저곳 쳐다보며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 친구의 차례가 왔고, 그 친구는 그중에 유일한 가정위탁 자립준비청년이었다. 그 친구의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알고 보니 내가 가정위탁이었고, 이제 3개월 정도 후면 5년 보호 기간이 끝나는 친구였다. 그렇기에 집이 급했고, 현재 가지고 있는 빛 또한 청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우선은 가정위탁지원센터와 연결해 줄 것을 약속하고, 괜찮다고 토닥여주었다. 필자는 이런 상황들을 현장에서 겪으며, 실제 가정위탁 아동들에 고충에 대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부에서는 가정위탁이 대안이라고 말하고, 모든 유형 중 가정위탁을 35% 까지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떤 가정에 어떻게 아이들이 들어가는 건지, 그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가정위탁 아동들은 "그래도 너희는 가정이 있었잖아"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그럼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 그 자리에서 할 말을 잃곤 한다. 그 가정의 기능은 무시된 채 말이다. 이것이 현재 가정위탁의 진실이다. 많이 보완했고, 나아졌다고 분명 말하지만, 단 한 명의 아이의 삶이 처참히 무너지고, 깨어진다면 그것이 과연 보완했다 나아졌다는 표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사실, 나에게 가장 마음에 남았던 신을 고르라면, 타마키로서 스즈메와 대하는 그 휴게소 장면이었다. 타마키는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버린 걸까라고 많은 후회를 하며 눈물을 보인다. 그리고 스즈메 또한 너무 당황해하며 자신의 마음에 있던 말을 뱉어 버린다. 사실 그 씬이 끝나고, 필자는 파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이야기가 나누어진 뒤, 둘의 관계는 매우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볼 수 있었다. 가끔 필자 또한 양육자가 차라리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했을 때가 있었다. 충격적인 현실아래, 수용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밀려올 때, 어떻게 감당하셨을까? 나 또한 훗날 그 모든 짐을 나 홀로 풀어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아마 그 일들이 풀리지 못했다면, 필자도 그냥 그렇게 그 짐에 묻혀서 살아갔을 것 같다. 그리고 뒤에서 다루겠지만, 그 시간들을 풀어내는 키 또한 나에게 있다. 결국,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후련해지는 것은 일시적이다. 근본적으로 그때의 나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필자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서로 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금기된 말들을 내뱉은 후에 관계의 진전이었다. 파국이 아닌, 결국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과가 오고 가는 용서의 과정이라는 것이 말이다.

가정위탁은 기저의 깔린 생각들이 있다. "미안함, 미안함 그리고 또 미안함" 사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크게 없음에도 마치 "내가 그 양육자들의 삶을 빼앗고, 훼손했다"라는 추측을 사실로 믿고, 양육자들에게 많이 미안해한다. 그 미안함은 또 다른 책임감으로 번지고, 그 책임감은 위탁아동들을 역부양까지 내몬다. 그 미안하다는 생각 끝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모와 스즈메와의 대화는 많은 가정위탁 아동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본다. 처음 시작은 스즈메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식음전폐하는 모습에 화가 난 이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차로 간 이모는 스즈메에게 무섭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할 거면 집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했고, 이내 스즈메는 "나도 힘들다고, 이모에게 날 책임져 달라고 한 적 없다, 이모가 먼저 와서 나랑 살자라고 하지 않았냐" 하며 말을 받아치게 된다. 그러자, 타마키는 해선 안될 말들을 스즈메에게 쏟아놓았다. 나도 "너 때문에.."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스즈메의 눈은 흔들렸다. 그렇게 둘은 어색한 사이로 차를 타고 다시 목적지로 향한다. 이때 차가 고장 나, 또랑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내 타마키는 낡은 자전거 한대를 타고, 먼저 떠난 스즈메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이내 스즈메를 태우고 마을로 향하게 된다. 이때, 타마키는 먼저 말을 꺼낸다 "주차장에서 했던 말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리고 나 역시도 너로 인해 감동을 받았던 순간들이 많았어"라고 말이다. 이 대목을 통해 타마키는 건강한 어른이구나! 성숙한 어른이구나!라고 느꼈다. 사실 어른들 중에선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사과하지 못하는 어른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마키는 스즈메가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이내 타마키의 말을 듣고, 스즈메도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한다.

그럼 왜 진작 이 이야기를 서로 꺼내지 못했을까?라는 부분은 필자가 당사자로서 생각해 본다면, 서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면 될 것 같다. 스즈메에게 타마키는 부모님이 아닌 양육자이고, 짐과 같은 자신을 떠맡게 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타마키에게 스즈메는 그저 보호해야 할 대상, 언니가 사랑한 언니의 분신, 자신이 끝까지 안고 가야 할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필자에게 조부모가 갑처럼 다가오듯 스즈메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모든 행동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끔은 그 생각에서 비롯된 성숙한 행동들도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 탈 없이, 아무런 폐끼침 없이 혹은 아무런 걱정 안 하게 때로는 내가 자랑거리가 되야겠다, 뿌듯하게라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들을 가정위탁아동들은 늘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타마키와 스즈메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다음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5) 스즈메와 어린 스즈메의 만남

스즈메가 소타에게 가는 길에 열었던 그 문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향한 그곳엔 스즈메가 용납하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묻어두었던 과거가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소타가 아니었다면, 스즈메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그 상황을 되새겨 보기 위한 다양한 순간은 존재한다. 필자에게 마음 한편에 묻어두었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내버려 두고 온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기보다, 스즈메가 마지막 어린 스즈메에게 말하는 것처럼 “스즈메의 내일”처럼 그때의 나를 수용하고, 안아주는 것이다. 그 마지막 스즈메는 어린 시절 자신이 보았던 것은, 스즈메 자신 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 실은 알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그 앎은 아마도 엄마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찾아 헤매는 어린 스즈메를 보고, 이렇게 말해준다. “앞으로 너의 삶은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잘 커갈 거고, 너의 곁에는 수많은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어린 자신을 꽈-악 안아주는 장면을 통해, 스즈메의 치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메시지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재난 혹은 버려짐, 혼자 남겨짐, 절망 등)에서 상처는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아,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다 보면, 돌아보게 되는 시간도 오고, 그러한 것들이 해결되는 시간도 올 거야!
지금 당장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너의 곁에는 너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이제 조금 더 용기 내보자!
나와보자! 이 세상으로! 그리고 너의 상처 앞으로!
필자 또한 회복탄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 가정위탁 아동들의 상황! 버려졌고, 가정이 생겼지만, 너무나 아프고 힘들고, 어렵고 살아가다 보니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그러나 그 안에서 함몰되지 말고, 주변을 봐, 무너져도 괜찮아, 지금은 그렇지만 넌 누구보다 빛날 거야”라고 말이다. 회복탄력성에 대한 많은 강연들과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의 힘은, 결국, “나를 존귀하게 보는 자존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단 우리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기억해야 한다. 최근 교수님과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내용이 떠올랐다. “가정위탁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겪고 있고, 더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라는 것이다. 나와 우리의 함몰되는 순간, 그 문제의 본질은 잃어버리게 된다. 그저 연민에서 발생되는 동정뿐이다. 그러나, 일반화시켜 생각하고, 내가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면, 적어도 회복의 시작이라고 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회피하는 심리와는 아주 다른 부분이다. 어린 스즈메와 스즈메가 만나는 장면에서, 그리고 타마키와 스즈메가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는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쓰다 보니 그리고 생각을 하고 곱씹을수록 더 많은 생각들과 마음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상황에 마음 아파해주기도 하고, 동정과 연민으로 도와주려고 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 도움의 손길과 마음들은 감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발언일 수 있지만, 가정위탁아동을 이 상황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 교수님과 미팅 자리에서 나눈 말을 빌어,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

“자립준비청년이라서? 가정위탁아동이니까? 혹은 장애를 가졌으니까?
아니, 다 똑같은 사람이고, 청년이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대해 나는!
더 특별하게? 더 안쓰럽게? 더 대견하게? 아니지”

위 교수님의 말처럼 그저,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 명의 청소년, 청년으로서 봐달라는 것이다. 더 이상 도와줘야 할 존재, 연민으로 감싸주고 안아줘야 할 존재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선택 그리고 안타까운, 안쓰러운 청소년들의 삶과 하루하루가 아니라, 묵묵히 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지지체계가 되어 달라는 당부를 드리며 이번 글은 끝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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