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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엘PD Sep 19. 2023

10분의 중단, 10년의 전진!

영국의 UPIAS의 사회모델과 윤리와 철학 사상을 중심으로

이 글에 대한 요청을 받은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어떤 말도 내뱉거나, 어떤 글도 쓸 수 없었던 것은 개인과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의 장애가 아닌, 나 스스로 장애인으로서 글을 쓰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내가 분명 장애인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겪고 있는 장애가 모두가 겪는 보편 장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3년 2학기 현재 장애인복지론 그리고 사회복지의 윤리와 철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글을 쓸만한 Insight 얻어, 이 두 가지의 수업에서 연결점을 찾아, 이 현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1. 의료모델과 사회모델의 손상과 장애의 개념

장애인을 규정하고 개념 짓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현재 장애인을 규정짓는 두 가지의 큰 명제가 있다. 바로 손상과 장애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손상과 장애의 국어사전적 개념은 이렇다.

손상은, 장기간의 장애나 사망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상해이며, 장애는 그로 인한 상해 또는 질병에 대해 충분한 치료를 하였으나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증상이 고정되어 신체에 남아있는 영구적인 정신 또는 육체의 훼손상태를 뜻한다.

즉,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견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의료모델로부터 온 정의이다. 그러나, 사회모델은 손상보다 장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기에 장애는 "상황상 존재하는 물리적 장벽으로부터의 장애"라고 설명한다. 그 시초가 된 영국의 사회모델은 그 당대의 장애인 권리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었다. 이것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장애는 사회가 만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만든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그 당시의 센세이션 한 주장이었고, 그 주장에 따라, 사회가 변화되어 온 것은 틀림없다. 특히 지체 장애인을 위한 장벽제거(턱 제거, 엘리베이터 설치, 리프트 설치 등)와 베리어프리 등과 같은 것에 주안을 두고 바뀌어왔다. 또한 그것은 한국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바로 권리운동의 시초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분명 장애인의 이동권 혹은 다양한 생존과 편의에 대한 문제는 정치화되기 쉽고, 슬로건화 되기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라 결과는 더욱 더 빠르고 급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없애고 만들어야 할 장벽은 많으며, 그것을 다 바꾸는 것은 비용적인 문제가 수반된다. 또한, 장애유형에는 지체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체장애를 위해서 한 일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오히려 반대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장벽을 제거하는 일만이 장애인을 위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장애를 손상으로 규정하지 않고 사회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차별의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사고로 손과 다리의 기능을 잃게 되어 장애를 갖게 된 사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회모델의 입장대로라면 이 사례자가 사회복귀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재활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손상으로부터 오는 영구기능장애에 대한 부분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모델에서의 장애는 접근성, 이동성, 편리성 증진이 되면, 더 이상 장애는 장애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어떻게 손상이 없는 장애가 존재하는가?"라는 것이다. 의료모델에서는 그 손상에 대해서 분명히 강조한다. 그리고 그 손상 자체를 '장애'로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모델은 손상에 대해 말할 수 조차 없다. 즉 장애를 개별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중심, 사회모델의 한계

사회모델의 한계는 너무 많지만, 전장연 중심으로 보자면, 장애인철폐연대는 사회모델에 입각하여 전개한 운동이기 때문에,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사회모델은 여전히 지적장애 혹은 자폐 스펙트럼 등 모든 장애를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지적이나 자폐는 개인의 문제로서 바라봐야 하고, 그 개인을 개별화하지 않으면 해결 또한 탁상공론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델의 적용점은 사실은 장애수용이 된 장애인들에게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애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중도장애 초기분들에게는 적절치 않은 부분들과 한계가 보인다. 그것은 장애를 입은 초기에는 '손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걷지 못한다' 혹은 '손을 쓰지 못한다'라는 것, 왜 그런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 장애를 사회적으로라는 것으로 확대할 여력이 사라지는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사회에서 안 살 것도 아니고, 결국은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은 사회모델이 하나의 떳떳한 구실이 될 수 있다. 즉 사회 탓만 하고, 내가 할 일은 하지 않는 사태가 극단적으로는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회모델의 한계이다. 손상과 장애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면 언제나 삶 속에서 손상과 장애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장애인이 계단을 만났다. 그 계단이 경사로로 바뀐다고 근본적인 하지마비라는 손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단은 넘을 수 있는 문제이니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지하로 내려가서 차를 타야 할 때, 내가 트랜스퍼(휠체어에서 차, 혹은 침대 등 어딘가로 옮겨 앉는 행위)가 되지 않는다면, 그 손상은 다시 문제로 뒤바꿈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제거해야 할 장벽은 매우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장애인 고용 문제도 그렇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살아감의 이유도 있지만, 거기에는 욕구에 마지막 부분인 자아실현이 맞닿아 있다. 장애인 일자리가 많아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 또한 전장연의 성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질적으로 좋아졌는가? 혹은 장애인에게 주어진 일자리가 자아실현을 이루어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  즉, 빛깔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

3. 전장연 시위에 대한 관점

그렇다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는 잘못된 것인가? 분명,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말할 수 없다. 또한 왜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저렇게 해야 하느냐라고 질문하시는 분들도 이해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해왔다. 사회모델은 배우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봐주지 않는 사회에도 분명히 문제는 존재한다. 그들의 시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이루어내는 것은 무엇일지? 모두가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는 게 진정 장애인들을 위한 것인지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분명 장애인을 위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안을 보자는 것이다. 

장애학의 쟁점:영국 사회모델을 중심으로라는  책 안에서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한답시고,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장애인들에게 제공하지만, 그 조차도 개별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다치거나, 고통을 당할 수 있고, 때로는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더 중요한 인간관계나 사회 참여가 어려워지는 것이 더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장연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분명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회맥락적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모델이 분명 모든 것들을 개척하고 바꿔온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단 한차례도 바뀌지 않았고, 장애인 권리 증진이라는 그 목적에 반하는 것들은 분명히 폐기처분 되어야 한다. 즉, 확증편향, 장애인 당사자조차도 가지고 있는 편견을 내려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의사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가 오늘 아는 것이 내일은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진단기준이나 책이나 이론이 나오면 전에것들은 다 쓰레기통에 넣는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복지가 분명 배울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 장애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더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하고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 無知의 를 적용한 사회복지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無知의 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른다라고 말하는 전제는 안다에서 시작하며, 거기서 아는 것이 많으면 안다고, 모르는 것이 많으면 모른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모른다라는 말은 정말 그것에 대해서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 아는 사실이 이미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말 모르는 개념이나 정의일 경우, 그거 진짜 처음 들어봐, 혹은 생전처음 들어보네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모른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일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안다라고 전제하는 순간 더 이상의 앎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은 상황이 발생되기도 한다.
최근 나는 주민센터에 신청할 것이 있어 방문하게 되었다. 주민센터에 들어가니, 장애인 전담 창구에서는 한 지체 장애인과 사회복지사 사이에 실랑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둘 다, "나는 장애에 대해서 잘 알아!"라는 생각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조금 들어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장애인인 본인은 "나는 당사자야, 그래서 더 잘 알아!"라는 취지였고, 사회복지사는 "나는 장애에 대해서 이렇게 배웠어, 그래서 이렇게 접근해야 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無知의  에 대한 부분이 결여되어 보이는 현상이었다. 이 사례를 통해 "내가 다 알아!"라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에 대한 관점과 실천에 대해 생각하든, 비장애인이 그렇게 생각하든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즉, "네가 당사자이니까 네가 제일 잘 안다"라는 것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당사자인 장애인은 그 '경험적 앎에서 오는 앎'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해야만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에서 빠져나와 사회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비장애인이거나 실천현장의 사회복지사의 경우에는 "내가 배운 장애라는 학문의 앎"이라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오늘 생전 처음 만난 클라이언트로 바라봐야 정확한 접근과 이해가 될 것이다. 또한 그리고 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볼 때 또한 "내가 이러니까, 얘도 이럴 거야"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장애를 가진 친구에게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및 제언

이 수업을 들으며, 병원에서 함께 보낸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공감과 지지 그리고 연대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사회모델, 그리고 모든 게 사회 탓이라고 하는 친구에게 나는 과연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다양한 장애는 장벽을 없애는 것 그 하나로 모두 해결될까? 그렇다면, 왜 여전히 장애인들은 장벽제거가 되었는데도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이 모델과 다양한 모델을 통해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 하나의 문제 해결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양산될 수도 있다는 것과 그 문제를 감쇠함으로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 중복 장애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전장연에서 하고 있는 시위 운동은 정말 장애인을 위한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지체가 아닌 모든 장애를 대표할 수 있는 운동일까?라는 것에는 여전히? 남긴 채, 이 글을 마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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