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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두운 세상인데(2)

역사는 진보(progress)하는가?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정마다 이런 족자가 걸려있다.


萬事亨通

家和萬事成

修身齊家治國平天下


희망사항을 담은 문구이지만

놀라운 일은 이 족자(簇子)  아래에서

다툼을 벌이는 진귀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이 또한 인간사(人間事)인 것을.


누구는 진화(進化, evolution) 주장했지만

과연 옳은 주장인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 이유는 나의 수족관에서 노니는

열대어를 바라보면

이들은 태고적부터 종(種)으로 태어나

오늘에 이른 것이지

진화란 이름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상의 헤아릴 수없을 정도의

식물들과 곤충 그리고 눈에 보이지않는

세균들 역시 진화를 거부한다.


유리창 안에 갇힌 현대인들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는 더더욱 그리하다.


내가 기억하는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자 확장하기 위한

침략과 투쟁의 역사이다.


알렉산더(B.C.356-323)

한니발(B.C. 247-183)

조조(曺操,155-220)

징기스칸(1162-1227)

나폴레옹 (1769-1821)

히틀러(1889-1945) 등을 열거하지 않아도

한반도 땅에서 발생한 전쟁의 역사가

이것을 말한다.


단군의 역사는

중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 통한 사료이기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영웅들

동명성왕이라  고구려의 주몽(朱蒙.B.C.58-19)

 백제의 계백(階伯.?-660),

신라의 김유신(金庾信,595-673),

고려의 왕건(王建,877-943)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다.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루었는가?

이들의 대의명분 (大義名分)으로 야기된

전쟁으로 인해 숱한 생명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저세상사람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는

이들을 엑스트라(EXTRA)라고 한다

즉 여분(餘分)의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엑스트라 배우는 한 드라마 혹 영화에서

죽음을 당하는 역할만 수차례 반복한다.

즉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이름도 없다.

칼에 찔려 죽고

말에서 떨어져 죽고

성벽에서 떨어져 죽고

배에서 떨어져 죽고

때로는 맞아 죽고....


이러한 현상이 과연 오늘과 무엇이 다른가?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거북선

역사는 흐르고

물질문명은 달나라를 넘어 우주를 향해

팔을 뻗치고 있는데

여전히 사람의 생명을 소모품처럼 간주하고

때로는 폐기물처럼 버려도

양심에 가책조차 받지않는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


이미 거대한 오피스텔은

감옥 아닌 감옥과 같다.

철문으로 굳게 드리어진 공간에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것 조차

경기(驚氣)  초래하는 사건이 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설정을

기피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사회학자 퇴니스의

공동사회(共同社會) 

이미 희미한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익사회(利益社會)안에서

적자생존경쟁의 치열한 투쟁 속으로

매일매일 달려간다.


"나는 자유하고 싶다.

 나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

 나는 경쟁이 없는 사회에 살고 싶다."

이렇게 외치는 일도 이젠 지쳤다.


과연

인류의 삶은 진보했는가?

아니면 더욱 더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고 존중하는 세상을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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