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代打)인생의 종지부를 찍다. 그러나 다시
늦깎이 입시생이었을 때
나에게 유일한 기쁨과 보람을 주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 고등부 찬양대 지휘를
하는 일이었다.
하루는 나를 가장 아끼는 직속선배가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네가 중등부에서
대타로 지휘를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어.
혹시 사정이 허락된다면
고등부 찬양대 지휘를 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선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목발을 짚고 지휘자가 되다니.
게다가 음악도 전공하지 않은 나에게
지휘를 부탁하다니."
이는 파격적(破格的)인 제안이었다.
지체장애인에게 지휘를 맡긴다?
21세기인 오늘은 가능할까?
장애인 합창단도 아닌데 일반 합창단을?
하여튼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리고 첫번째 찬양대 연습을 하던 날.
토요일 오후 2시.
나는 습관대로 30분 전에 연습실에서
학생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2시가 지나도 참석해야 할
학생들의 절반만이 연습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 학생들은 중등부에서
나의 성격이나 생활패턴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분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과
성실하게 참석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어."
이것이 나의 모토(Motto)이고
좌우명(座右銘)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휘하는 시간에
학생들이 지각을 하다니.
"선생님!! 전에 계셨던 지휘자님은
늘 30분이상 늦으셨어요."
"그것은 그렇고. 지금은 내가 지휘하지요?
여러분도 나를 잘 알고 있을텐데."
"아이들은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봐요
사실 지휘자 선생님께서
오지 않은 적도. 많아요..."
"어쨌든 그것은 과거이고
오늘부터는 '내 '가 지휘하니까."
사실 제시간에 참석한 친구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과거,
지나간 세월 속에 씁쓸한 추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행사에 참석했을 때이다.
10시 정각에 우리는 참석했었다.
그런데 약20%정도가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불같이 화를 냈다.
약20분동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못하고 다 쏟아냈다.
"아니 너희들. 이렇게 지각할 수 있어!
도대체 지금 몇시야?
우리 약속시간이 몇시인데
왜 이리 늦는거야?
진짜 너희들 이렇게 행동할꺼야?"
제시각에 참석한 우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분의 분노를 다 받아내야 해야했다.
그분의 분노가 가라앉을 즈음
지각생들이 주섬주섬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결국 제시각에 참석한 이들이
그분의 화를 다 받아내야했었고
정작 지각생들은 그 분노로부터 벗어났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내가 저 위치에 서 있게 되면
저 선생님처럼 행동하지 않을꺼야."
학생들의 말대로 30분이 지나서야
연습실이 다 채워졌다.
아무 말없이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한시간동안 연습을 진행했다.
연습을 끝낼 즈음,
나는 학생들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나를 잘 알지요?
나는 이전 지휘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연습시간 정각에 늦으면
여러분은 연습실에 들어올 수 없어요.
일찍 제시각에 참석한 친구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 없어요.
알고있는 것처럼 고등학생의 시간은
다이아몬드 같이 귀해요.
내 시간도, 여러분 시간도 귀하고 귀해요.
앞으로 나는 정각에 시작해서 정각에 마쳐요
이것은 꼭 지킬꺼에요.
여러분도 시간약속을 지켜주길 바래요."
신기하게도 이 시간 이후로
연습시간에 늦은 친구들은 한명도 없었다.
물론 아주 가끔 피치못할 사정으로 늦게 온
친구들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배려가 제공되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지휘자로 데뷰하였다.
대타인생-대타 지휘자의 삶-은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다시 대타 인생을 감당해야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늦깎이 입시생 준비를 하고 있던 때
-사실 이 일은 아무도 몰랐다.
부모도 친구도 전혀 몰랐다.-
중단했던 입시준비를 다시 시작했을 즈음
9월 중순에 고등부 전도사님이
전격적으로 사직(辭職)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는 후임자를
즉시 구하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후임자를 구하지 않았다.
"당분간 선생님께서 설교를 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