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운전은 해야 해
근육질의 몸.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민혁은 인도로 선교사를 지망했다.
"내 한 몸 바쳐서 힌두의 나라 인도
그 거대한 왕국의 그늘에 가린 사람들
바이샤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참 빛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민혁은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육신만이 아니라 토목 건축 전기 제빵 수지침 그리고 바리스타에 이르기까지. 각종 자격증까지 준비했다.
인도의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신실한 여인을 만나서 결혼도 했다. 아내도 국제운전면허를 획득했다. 간호사였던 아내는 이방(異邦)지역 영혼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다는 목적으로 의사가 아닌 간호사 자격을 갖고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나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과 딸도 선물로 주셨고, 두 자녀에게도 아빠엄마가 인도로 가야할 이유도 틈틈히 설명도 했다.
이 일을 위해 나아가는데 가족의 뜻은 하나로 모아진 지 오래되었다. 인도어로 사역을 하려면 일정금액의 후원도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민혁부부가 소속된 선교협회와 여려교회가 매달 정기적으로 기한없이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제 떠나면 된다.
인도 현지에 있는 마크(Mark)가 연락이 왔다. 공항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파송예배(派送禮拜)를 드리고 민혁식구는 공항으로 나갔다.
뉴델리 국제공항.
"왜 나는 인도로 정했을까?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는데."
TV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기 위해 갠지즈강 흙탕물에 자신을 담그고, 그 곳에 신분차이에 따라 시신(屍身)을 화장(火葬)하여 떠나보내는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삶에 참 빛을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민혁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민혁은 인도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민혁을 본다면 "왜 남의 나라 문화를 폄하하느냐?"고 비난할 지 모른다. 하지만 민혁은 이들과 다르게 판단했다. "이조시대 말기 약 10%미만의 양반들이 90%의 국민들을 괴롭히고 결국 조선이 일본에게 잡아먹힐 때, 이들은 앞장서서 친일파가 되었다. 이런 모습을 네덜란드 선교사 하멜(Hamel)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런 조선말기의 모습을 비난할 때, 이또한 "남의 나라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언론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고 국민의 빈곤을 방치한 북한의 모습에 대해 비난하면 이것도 "남의 나라 문화"에 대한 것인가? 오늘 우리의 문화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더나은 진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인도의 문화는 과거에 머물고 사람을 존중하는 더나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의 모습은 마땅히 긍휼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래서 민혁은 선교사로 인도로 향해 나아가기로 결단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약9시간 비행을 하여 뉴델리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마크(Mark)는 짐을 들고 낡은 승합차로 다가갔다. 차에 짐을 싣고 민혁의 네식구는 차에 올랐다. 약10시간을 달렸다. 약20시간만에 정착해서 사역을 실천에 옮겨요 할 장소에 도착했다.
현지에 몇몇 사람들이 환영을 나왔다
선교지가 늘 그렇듯이 서울에 비하면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민혁부부가 그동안 언어훈련을 잘 준비했기에 현지인들과 소통에는 어려움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인도선교. 좌충우돌하며 적응하는데 여려움도 겪었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약5년만에 인도현지인들을 위한 제과제빵 기술소도 열고 카페도 운영하며 기초단계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현지언어를 영어와 더불어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아내는 간호사 자격과 경력을 가지고 카페를 운영하면서 한 구석에서 의료적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여인들을 대상으로 사랑의 의술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말기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민혁부부는 제과제빵 훈련과 카페, 의료서비스 등의 직업훈련을 중심으로 현지인을 고용하기도하면서 사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자이푸르와 암베르 지역까지 서서히 확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후원금도 많아져야겠고 운전하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에서 후원하는 의료품을 받기위해서 종종 뉴델리까지 오가는 일도 많아졌다. 이뿐 아니라 현지인과의 관계가 좋아진 면과 갈등을 겪는 부분도 보이지 않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8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중등학교 입학과 아울러 사춘기 기간을 통과하면서 가족 안에서의 남다른 돌봄과 소통의 어려움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 후원을 하는 교회, 단체, 지인을 대상으로 선교보고가 담긴 후원편지를 보내면서 차츰 인도선교현장에 단기선교란 이름으로 방문하는 이들에 대한 준비와 협력도 적지않은 일이었다.
십년이 지나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되면서 민혁은 신체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별것 아니겠지 아직 절은데"하며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지나갔던 것이 화근이 되기 시작했다.
초기대응이 문제였다. 가까운 의료기관으로 옮겼지만,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이 최선이었다. 결국 현지선교를 10년간 함께 했던 현지 책임자에게 인수를 하고 가족들 모두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민혁은 1년간의 재활끝에 신체의 반을 사용하는 존재가 되었다. "반신불수(半身不隨)"라고 표현하지 마세요. 반신유수(半身有隨)라고 해요." 민혁은 반을 사용하게 된 것이 어디냐하며 더 적극적인 재활에 들어갔다. 비록 시력과 청력 그리고 사고력의 일부는 손상되었고 왼쪽 팔과 디리는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목발을 짚지않고도 -절뚝거리지만- 다닐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나 다시 운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보. 당신이 나의 왼쪽 눈이 되어주시오." 민혁 아내는 가까운 병원으로 취업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길이다. 그러나 남편의 강한 의지를 제지할 생각도 없었다. "당연하지요. 당신의 왼쪽 눈만 되겠나요? 이미 당신의 전부가 나인데."
부창부수(夫唱婦隨)가 따로 없었다.
민혁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이런 여자를 어떻게 나에게 보내셨나?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다고. 하나님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민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보 나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해요. 첫번째 생은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두번째 생은 건강한 반쪽으로 태어났어요 마지막 날 세번째이자 마지막 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겠지요?"
아내는 민혁의 왼손을 꼭 잡았다.
"여보 우리는 0.5가 아니라 1.5입니다.
하나반. 충분히 시작할 수 있어요."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고생이 된 아들딸이 달려오며 말한다.
"아빠엄마 1.5가 아니라 3.5입니다. 우리가 곁에 있잖아요."
민혁은 세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보니 3.5도 아니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사도바울이 고백했잖아 내가 약할 때 더욱 강하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통해 온전하게 드러난다고. 고마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어서."
민혁과 아내, 두아이는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