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1

변화와 안정, 둘 다 잡을 수 있을까?

필수는 올해 40대 중반이 되었다.

필수는 누구나 그리 말했듯이 가난한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용직에 근무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 다섯을 낳고 끊임없이 일했다. 그러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필수가 성장과정에서 본 아버지의 직업은 약1년반에서 2년사이에 한번씩은 바뀐 것으로 알고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시기가 될 때, 필수는 모름지기 "무슨 일이 있구나!"하고 직감을 하곤 했다. 이즈음 아버지의 낯색은 매우 어두웠고 일곱식구를 먹여살려야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있는 듯 보였다. 어머니도 필수가 열다섯이 되던 해 일터로 나가기 시작했다. 식당 설거지로 시작해서 어린이집 조리원 등하교차량 지도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시면 일곱식구를 먹이기위한 음식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9~10시가 되면 어머니는 기절했다. 아버지도 생활력이 강했지만 어머니를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two-job. 또는 three-job을 뛰었기 때문이다.

필수는 이런 부모를 보면서 사춘기 시절부터 속으로 굳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나는 꼭, 반드시 안정된 생활을 하고 말꺼야.'


필수는 어리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정리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공부밖에 없어." 틈이 나는대로 필수는 공부에 전념했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헌책방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선배들에게 부탁해서 사용하지않게 된 참고서를 얻어다가 방구석에 쌓아놓았다. 어느날 옆집 형과 누나로부터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참고서를 얻어 품에 안고 집으로 올때 즈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


필수는 장남으로 부담감도 있었다. 필수 아버지는 필수가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잘 보살피기를 기대했다. "우리 가정 형편에 무슨 공부를... 일찍 취업해서 돈 버는 것이 좋지않겠니? 하긴 공부를 하지않으면 네부모와 같은 처지가 될텐데... 그렇다고 너를 지원해줄 형편도 안되고.. 그러나저러나.," 필수 아버지는 어느 골목에서 줏어왔는지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고 길게 들이마시다가 이내 콜록콜록하며 담배꽁초를 땅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다헤어진 검은 운동화로 짓밟아 뭉게버린다. "에이 담배도 피울게 못되. 필수야 너는 절대 담배 입 근처에도 가까이하지 말아라."


바깥이 어둑해지니까 필수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셨다. 어머니 신발 터는 소리가 나자마자 잠을 자던 동생들까지 일어나 어머니 품에 안긴다. 마치 이산가족상봉장면을 보는 듯하다.

필수는 속으로 생각한다. "어머니가 계시지않으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가끔 아들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차리리 딸로 태어났으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을텐데."하고 읖조리건 했다.


언제나 필수를 둘러싼 환경은 이런 모습의 반복이었다. 동생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처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월세(月稅)를 꼬박꼬박 냈기에 집주인은 더이상 보증금과 월세를 올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집은 점점 좁아지고 숨을 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드디어 필수는 대학에 입학을 했다. 저소득, 농어촌 전형과 아울러 성적 장학금을 받아 필수는 바라던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독립을 하겠습니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 책임지도록 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필수는 폭탄을 던졌다. 필수를 의지했던 부모는 마치 장남의 장례를 치루는 심정으로 아연실색했다. 찬성과 반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실을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얘들아.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야 해. 내가 보던 책은 그대로 놓아둘테니까 잘 보고 동생들에게 넘겨줘. "이제 고등학생이 된 둘째는 형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떨군다. "형 진짜 집을 떠나는거야?"


필수는 대학교 근처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짐을 싼다. "두서달 열심히 일해서 기숙사 비용을 마련할께요. 그동안 학교근처 선배 자취방에서 생활하도록 할께요." 필수는 집을 나섰다. 이제 열아홉. 아직 스무살도 되지않은 어린 필수였지만, 누가보기에는 서른도 훌쩍 넘은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필수는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고 공부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아르바이트 뿐 아니라 공부를 위해 잠을 자는 시간도 줄여야했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동기들의 취침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특단의 대책도 세워야했다. 이러저러한 제약을 이겨내면서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의도는 무리해보였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필수는 종종 고민에 빠진다. "미팅은 이상이고 학업과 생활을 동시에 해나가는 일이 늘 나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는데.. 어느 때가 되어야 내 삶에 안정이 찾아올까?"


대학생활은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았다. 방학때 고작해야 하루이틀 정도 집을 찾아가 부모님과 동생들을 잠간 보게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학금을 놓지지도 않았고 교내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인 부분은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근근히 처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군대생활을 통해 저축한 돈도 결코 적지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도 성공적이었다.


회사곁.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신입사원으로 출발했다. 경쟁율이 25:1이었지만, 필수는 당당하게 합격을 했다.

"이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

매번 구직란을 검색하며 일자리를 구하는 번거로움도 겪지않아도 된다."

마음에 안도감이 자리잡는 순간 둘째 동생이 대학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가서 취업하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니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지방으로 간다고? 대학도 포기하고.

그래 그것도 네 인생이니까. 나는 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필수는 집을 나올 때 부터 장남이라는 짐을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길만이 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는 길이라고. 나머지 동생은 부모님 몫이고, 필수 자신이 집을 나가 독립한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부터 자유케하는 일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필수는 직장에 출근하면 안정(security)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물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려고 뛰어다니고 굽신거렸던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주어진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필수 자신보다 넉넉한 형편에서 입사한 동기들, 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선배들, 높은 성과를 요구하는 상사들 아래에서 경쟁하고 살아남는 일은 입시준비, 입사준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전쟁(戰爭, WAR)" 이었다.

퇴근해서 작은 오피스텔로 돌아와 구석에 자리잡은 라꾸라꾸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면 심신(心身)이 다 시들어버린 무청과 같다는 느낌을 매일 겪는다. 그렇다고 누워 잘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혼자 영어 TOEFL, 일본어 책을 펼쳐서 공부를 해야했다.


필수는 직장 분위기를 일찍 파악한 듯 했다.

"다른 사람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서 조금 빠르게 내딛지않으면 내일은 보장되지 않는다."

필수는 샤워를 마치고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