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2

변화와 안정, 둘 다 잡을 수 있을까?

필수에게는 쉬는 날은 없었다.

'원 룸에서 벗어나려면?.."

필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19살, 집을 떠났을 때,

친구네 집을 떠나 기숙사로 옮겼을 때

그리고 지금 원룸(one room).

나름대로 진보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필수에게 승진이나 경쟁은 그 어느 누구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현재.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 뿐. 한가지 다른 소망이 있다면 안정이 보장된 주거지(住居地)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느덧 필수는 서른 살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사이 영어, 일어 회화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통역없이 해외출장도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흙수저의 반란이랄까?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팀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집을 마련하려면 나혼자로는 쉽지얗아.

결혼을 해야해."

나름대로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여겼지만, 필수에게는 준비된 것이 전혀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청약예금을 열심히 채웠고 이제 주식에 대한 눈도 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정을 만들기에는 태부족이었다. 게다가 필수에게는 부모님을 통해 갖게된 가정에 대한 부정적 트라우마가 있었다.

"누가 나와 결혼하겠어? 나 자신도 부족하지만.

아마 내가 결혼을 하게되면 부모님은 필수의 아내가 아니라 맏며느리가 들어왔다고 짐작하겠지. 누가 그 부담스러운 자리에 주인공이 되려고 할까?"


필수는 이러저러한 상념 속에서 잠시 가졌던 결혼에 대한 개념은 지워버렸다. "결혼은 나와 상관이 없는 단어야. 내 사전에는.."

필수는 다시 출근 준비를 한다. 실제로 직장에서 살아남는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과 배경을 가진 후배들이 쏙쏙 입사해서 자신 아래에 배치되고 있다. 물론 과장 부장들은 필수가 아직 넘어갈 수 없는 지위의 사람들이다.


전쟁은 가열되고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팀장에서 과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필수가 감지하고 있는 현실은 직장생활만을 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변의 인맥관리(personal connections)도 탄탄하게 유지 확장해야한다는 것이다. 50대 초중반에 회사를 나가더라도 살아남을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더더욱 그렇다. 필수와 같이 홀홀단신으로 사회에 진출한 사람은 더욱 그렇다.


집을 나가면서 필수는 핸드폰을 열어본다. 아직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하니까 그런 면에서 편리한 것도 있다. 오늘의 일정과 만나야 할 사람(B to B, B to C) 그리고 성취해야 할 과업들을 꼼꼼히 체크한다. 점점 관계의 폭이 두터워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고무적이다. 필수는 속으로 웃는다. "나에겐 이 일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쉽지않아."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술담배를 배우지 않았는데, 우려스러운 것 이상으로 이런 필수의 모습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부정적이거나 낙인이 아니라 도리어 신뢰할만한 장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보기에는 시골샌님 같아보일지 모르지만 도리어 투명하고 친근한 인간관계가 더 끈적끈적해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이사가 필수를 사무실에 불렀다. 필수는 빠른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이 팀장. 혹 결혼에 대해 관심은 없나?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물어보기도 뭐해. 그래도 알고 싶었어요. 이 탐장의 생각을"

필수는 이사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결혼에 대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지금 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에 여유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결혼(結婚)'이란 두 단어를 생각할 겨를이 전혀없었다. 필수에게 가장 중요했던 아니 절실했던 것은 "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필수가 죽어라 공부하고 집을 떠나 전쟁같은 삶을 매일매일 견뎌온 이유는 단하나 "안정된 삶(Stable Life)"을 누리기 위한 것 뿐이었다.


순간, 필수는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랐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사는 사람과 편안하게 사는 사람, 두 종류만 존재한다.(There are no men and women in the world, but only those who live in anxiety and those who live in comfort.)'는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필수는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결코 일중독(workaholic)이 아니라 안정된 삶에 깊이 매몰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후로 필수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해외사업팀에 파견된 것이다. 필수는 인도를 거점으로 일본을 오고가는 관리팀 부책임자가 되었다. '달동네 출신 뜨네기가 해외로 나가다니' 필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때 집에다 알려야되는가 하고 고민했다. '아니 새삼스럽게?' 라고 자문하다가 '그래도 기본적으로 알려야하지 않은가? 살아있는데.'라고 갈등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출국하기 사흘 전 필수는 집에 가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 필수는 부모님과 동생들 선물, 그리고 약간의 용돈을 봉투에 넣었다. 봉투마다 이름을 정성껏 써서 넣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참으로 오랫만이다.

집을 떠난 지 십수년만이다. 그 사이 집을 찾은 것은 다섯번도 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부모님도 동생들과의 연락도 자주 하지않았다. 문 앞에 서게 되니 진짜 이방인(stranger)으로 가족들을 만나는 심정이었다. '아직 이 집에 살고 있겠지.'

필수는 초인종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낯선 음성과 함께 생소한 얼굴이 다가온다.

'누구?'

사춘기를 지나는 듯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엄마 누가 왔어요.'

'누가 왔다고? 누가?'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이 때 나이가 지긋이 든 여성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왔다.

"어머니. 저 필수에요."

"필수? 필수? 진짜 필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