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아이들은 벌써 2차 성징을 겪는 중이고 남자와 여자와의 신체적인 차이를 굳이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낱낱이 알게 될 때다. 의미 없는 억지 거리를 두며 남자 편 여자 편으로 팀을 갈라 서로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기 바쁜 시기였다.
사실 거리를 둔 건 더 어릴 적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인 듯한데
학부모님들 앞에서 재롱잔치하듯 선 보일 꼭두각시 춤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내가 원한 짝꿍이 아니고 어이없게도 키 순서대로 대충 정해진 짝꿍과 댄스를 하여야 하는 시간. 내 맘에 드는 짝꿍은 저 쪽 다른 여자애랑 짝이 되어버려 콩밭에 가 있는 마음 때문에 정작 호흡을 맞춰야 할 내 짝꿍과의 율동은 계속 어긋나기만 했다.
정말 싫은 건 스킨십!
싫은 데다가 어색하기는 또 이보다 더 어색할 수가 없다.
희한하게도 율동에는 마주 보고 두 손을 잡거나, 나란히 옆에 서서 한 손씩 잡거나, 등 뒤로 보내 온 손을 잡거나 하는 그 놈의 손 잡는 동작이 항상 있었다. 고작 아홉 살인데도 "얘는 남자야, 난 여자고. 그런데 왜 꼭 손을 잡아야 하지? 아... 참 싫은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연스레 서로가 쭈뼛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의무감으로 활동하던 댄스 시간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일곱 살만 되어도 남녀는 한 자리에 같이 있으면 안 되고 내외를 해야 한다는 유교사상이 너무 주입된 이유였을까. 거기다 더 어이없는 것은 손을 잡는 동작에서 남자는 가만히 하늘을 보게끔 손바닥을 두고 있으면 꼭 여자가 그 위에 손을 포개야 하는 게 국룰이었다. 그것도 참으로 못마땅했다. 역할을 바꿔 여자인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남자가 고마쒜리 콱 잡아주면 좋겠고만~! 왜 가만있는 남자 손 위로 여자인 내가 능동적으로 나의 앙증맞고 귀여운 손을 올려야 하는 거지? 하며 얼굴이 살짝 빨개지며 부끄러운 마음을 꾹 참고 별 수 없이 손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율동에 집중하다 보면 처음만 어색하지 점점 익숙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젠 니 손이 내 손 같고 내 손이 니 손 같은 느낌이 들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신나는 율동에만 신경을 썼었다. 그렇게 얄딱꾸리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사회시간
갑자기 게임을 제안하신 선생님.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선 우리가 좀 더 주체적으로 공부하길 바라신 마음에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을 '누가 누가 더 많이 대나' 게임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인원수대로 팀을 만들어 주셨고 각 팀의 대표는 팀원들이 적어 준 나라들을 취합하며 나라 이름을 외우고 또 외웠다. 교실 맨 앞에 나가 번갈아 가며 나라 이름을 대야 하는데 퍼뜩 떠오르지 않아 잠시만 머뭇거려도 타임 오버를 들으면 탈락하고 마는 아주 손쉬운 게임이었다. 팀원들은 내가 그나마 자기들 중에선 똑똑해 보였는지 아니면 나라 이름 따위는 외우는 게 귀찮은 거였는지 나더러 팀대표를 하라고 했고 나는 우리 팀의 승리를 위해 구불구불한 뇌 안쪽 구석구석까지 나라 이름을 꾸욱 꾸욱 욱여넣었다. 그렇게 나의 노력은 빛을 발했고 드디어 결승전~!
여태껏 가뿐히 이겨 온 예선전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결승전이라는 그 단어는 살짝 나에게 압박으로 다가왔다. 게임을 진행하시는 선생님께서도 살짝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시며
"자~ 이제 시작해 볼까~~ ^^"
하시는데 갑자기 우리 팀의 남자 부반장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선
"선생님~! 저, 루시아한테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알려 줘도 될까요?"
하는 거다. 당시 난 여자부반장, 그 아이는 남자부반장.
그 아이의 얼굴은 하아얗고 머리스타일은 단정하고 윤기가 흘렀다. 옷 따위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입고 다니고 때로는 더럽기까지 했던 그 당시 남자아이들에 비해 항상 깔끔하고 옷맵시마저 느껴지는 바디라인, 키도 큰 편이고 공부도 잘 한 그 아이.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있었지만 딱히 누구와 커플은 아니었던 그 아이가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교실 앞 교단 쪽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대편은 듣지 못하게 자기 손을 동그랗게 말아 내 귀를 감싸 쥐듯 하며
"만약에 이름 대다가 생각이 안 나면 '통과'라고 해. 그것도 나라 이름이야~"
하고...
청춘 로맨스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외웠던 나라이름은 바운스 바운스 심장 박동소리에 떠밀려 저하늘 구름 타고 멀리 멀리 떠나 버리고...
결과는 당연...
우리 팀이 지고 말았다.
부반장이 용기 내어 내게 소곤소곤 알려준 '통과'라는 나라 이름은 써먹지도 못했고 말이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덩치는 내가 더 작은데 사진이 아쉽네. 출처. 핀터레스트
중학교 때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인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일은 왜 아직도 이렇게 생생히 기억이 나는 걸까.
귀에 대고 조용조용 이야기하던 그 남자아이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알 수 없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백지영, 옥택연의 "내 귀에 캔디"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참~ 덧붙이자면 "통과"가 아니라 "통가"라는 걸 밝힌다. 그 아이는 지금 내가 저를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알기나 할까~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던 그 아이도 지금 어딘가에서 아이 아빠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나처럼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겠지? 행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