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태몽에 관한 글을 읽다가 기억력이 썩 좋지 않은 나는, 우리 꼬맹이들 태몽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쉬우면서,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몇 자 적어본다.
내가 태어난 해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2년 앞둔 여름이었다.
아빠는 사우디로 일을 하러 가시고 혼자 두 살배기 언니를 키우며 지내시던 엄마의 뱃속에는 내가 있었다. 엄마는 임신하기도 전에 결혼하신 즈음부터 외할머니께 아이를 낳게 되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막연히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을 미래의 이야기. 엄마는 임신 전이었고 아무리 옛날이라 하더라도 설마 애를 혼자 낳겠나 하는 생각에 귓등으로 흘려들으셨단다.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아빠도 안 계시고 친척들은 멀리 살고 산파에게 미리 연락도 안 해 두었던 상황에 갑자기 산통을 느낀 엄마는 그제야 준비해둔 짐을 다급히 챙기고는 병원으로 한발 한발 떼던 중이었다. 처음엔 아프지 않은 시간이 꽤 길어 부지런히 걷는다고 걸었지만 점차 진통 주기는 짧아지고 고통에 아득해진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짐작을 해 보아도 병원까지의 거리는 택도 없이 멀다고 계산.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선택을 하셨다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혼자서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나를 낳으셨다. 6월의 때 이른 더위로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마침 옆집의 새댁이 지나가다 평소 들리지 않던 갓난쟁이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 집에 들러서는 기절한 엄마를 보고 당황했더란다. 그 당시 엄마와 나는 탯줄로 여전히 이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것도 모자라 탯줄은 내 목을 두 번이나 감고 있었다고... 새댁은 엄마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급한 생각에 부랴부랴 가위를 들고 "탯줄을 잘라야 한다던데..." 하는 어설픈 정보를 떠올리며 탯줄에 가위를 갖다 대는 순간 엄마는 극적으로 깨어나 있는 힘껏 새댁을 밀었다.
"아니. 그러면 안 돼..."
나도 애엄마로 산지 12년쯤 되었으니 아이를 낳을 때는 정말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을 실감하는데 이미 탈진 상태에 없던 힘을 다 끌어모아 새댁을 밀기가 쉬운 일은 아니셨을 터였다.
도와주려 했던 새댁의 마음은 너무 고마웠지만 엄마와 나 둘은,
나의 생일날이 곧 제삿날이 될 뻔한 상황을 맞을 뻔했다.
탯줄은 엄마의 영양분을 아이에게 주기 위해 연결된 줄인데 무턱대고 그 이어진 탯줄을 자르게 되면 엄마의 혈액도 아기의 혈액도 모두 흘러나와 죽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외할머니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엄마에게 방법을 알려주셨더란다. 탯줄의 가운데에서 약 3센티 정도 엄마 쪽에 실을 묶고 또 아기 쪽으로 실을 묶은 후에 그 가운데를 가위로 잘라야 한다는 것을. 요새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 신생아 배꼽에 한동안 달려 있는 플라스틱 집게가 과거의 실 역할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어찌 되었든 엄마는 있는 힘을 겨우 짜내어 새댁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겨우 탯줄을 끊어낸 걸 확인하고 다시 기절하듯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
혼자서 사투를 벌이셨을 엄마께 너무 감사하기도 다행이기도 한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또 너무 소름 돋는 건 기절했던 엄마가 새댁이 가위질한 후에 뒤늦게 깬 것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타이밍에 눈을 뜬 건.
신조차 갓 태어난 나와 혼자서 아기를 낳은 쓸쓸한 엄마를 가엽게 보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