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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프게 알면 마이 아파

아프냐? 나도 아픈 것 같다.

by 루시아


1992년 모 대학교 실험실이다.

실험 조교의 진지한 외침을 시작으로 실험이 시작된다.

절대 입으로 빨면 안 됩니다!! 절대로 입으로 빨지 마세요!!


다들 자못 진지한 얼굴들로 실험에 임한다. 실험 준비물에는 염산이 포함되었고, 염산의 무서움은 묻지 마 테러 등으로 이미 알고 있어서 다들 조심하느라 행동거지는 신중 그 자체다. 묻지 마 염산 테러는 길가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염산을 뿌려 위해를 가한 사건을 말한다.
약한 산은 음식의 맛을 내는 데 사용하는 식초를 비롯하여, 사이다나 콜라에 들어 있는 탄산, 그리고 각종 신맛이 나는 과일, 심지어 김치에도 들어가 제 역할을 한다. 우리 입맛을 돋워 주는 역할을 하는 산은 우리 몸 안의 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산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가 먹은 음식들을 녹여 양분을 흡수하게 하고, 음식과 함께 들어온 각종 이물질과 세균을 모두 녹여 버림으로써 각종 질병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산은 대부분 농도가 묽은 약한 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실험시간이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실험을 할 때는 약산으로는 어림없다. 강한 산을 이용해야 결과가 확실하고 실험의 진행 속도도 빨라진다. 강한 산은 위에 나열한 것과는 다르게 매우 위험하다. 염산테러라고 칭할 정도이니 극소량도 매우 치명적이다.
실험을 하다가 자칫 한 두 방울 옷에 튄 흔적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구멍이 뽕뽕 뚫린 옷이 그 결과물이다. 때때로 제법 많은 양의 염산이 옷에 튄 학생은 커다란 두툼한 전공 서적을 꼬옥 품 안에 안고 집에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배 한가운데 지름 10cm의 뚫린 구멍으로 남들에게 참외배꼽인지 일자 배꼽인지 까꽁하며 광고하고 돌아다닐 순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위험 물질을 소량만 사용하는 실험이므로 해당 용액을 채취하기 위해 필요한 실험 도구 또한 세밀한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피펫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도구를 사용하여 위험 용액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다. 피펫은 우리가 초등학생 때 한 번씩 만져보았던 스포이트와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관이 좁으며 눈금이 세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꼭 투명한 빨대처럼 생겼다.

피펫(pipette). 양 끝이 열려 있는 가느다란 관. 아주 정확한 양의 액체를 하나의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옮기는 데 사용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한데 스포이트와는 달리 윗부분에 펌핑 역할을 하는 고무 주머니가 없다. 액체의 응집력만으로 용액이 좁은 관을 타고 올라오면 위 열려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막아야 용액을 흘리지 않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다.



자. 이제 용액의 응집력만을 기다린다. 인고의 시간이다. 제 아무리 응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올라오지는 않는다. 실험시간은 보통 4시간에서 5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항상 실험시간은 연장이 되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초조하다. 집에 빨리 가고 싶다. 응집력이고 나발이고 얼른 실험을 빨리 끝낼 방법을 떠올려본다. 그동안 3퍼센트의 뇌만 일을 했으니 나머지 97프로야 일을 해라 일을~!


아~! 생각났다. 아까 그 조교의 말!




절대 입으로 빨면 안 됩니다!! 절대로 입으로 빨지 마세요!!



선악과를 절대 먹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먹고 만 이브처럼...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염산... 그것도 아주 농도가 진한 강산...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조심하면 된다. 손가락으로 막아야 할 입구에 입을 가져다 댄다. 빨았는지 느낌도 없게 정말 약하게 숨을 들이켜 본다. 눈으로 급히 확인해 보는데 아직 양이 적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다시 시도한다.

흐읍... 으악~!!!!!!!!!!!!!!!!!!!!!!!!!!!!!!

그 독한 것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빨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조교가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 실험실로 튀어 들어오고 하지 말라는 짓을 왜 했냐고 소리를 치고는 황급히 무언가를 찾는다.
조교의 손에 든 것에는 염기성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얼른 입안에 넣고 헹구라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안에 넣고 가글을 한다. 뭔가 이상하지만 낫는 과정이리라. 그리고는 조교가 내 손을 잡고 뛰어간다. 두 발은 멀쩡하니까... 그리고 병원 응급실이다.



산과 염기의 잘못된 만남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의사가 내 입안을 보더니 꽥~!!!!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그러더니 옆에 인턴처럼 보이는 꼬마 의사에게

누가 응급처치 이렇게 해 놨어~!!!!!!!!
누구야~!!!!!!!!!!!!!!!!!!


모두 꿀 먹은 벙어리다. 당연히 손 들고 나올 사람은 없다. 옆에 서 있던 조교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놀라 쳐다본다.

한두 방울의 산이 입힌 상처를 당한 입 안에 중화시키겠다고 입에 머금고 가글한 염기성 용액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었다. 조교는 그동안 배운 지식을 이용해 산을 중화시키려면 염기가 필요하다는 것 만을 알고 어설프게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른 프라이팬에 배합 안 된 양념을 각각 하나씩 흩뿌리는 것과 같아 요리는커녕 프라이팬만 타버리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쉽게 말해 용액 상태에서 같은 비율로 섞어야 하는 것인데 그를 어긴 것.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비누나 빵을 부풀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명 소다라는 것도 염기성 물질을 이용해 만든다. 하지만 강염기 또한 강산처럼 매우 위험하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

가끔씩 하는 말 중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라는 말이 있다. 양잿물이란 옛날에 빨래할 때 사용하던 물질로 가성소다라고도 불리는 수산화나트륨을 물에 녹인 것을 말한다.
아마 이런 맥락으로 양잿물의 위험함도 포함시키는 속담이 아닌가 싶다.

입 안에 대차게 수난시대를 겪었던 나는 한 달 동안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고 호스에 의존했던 기억이...







우리는 어설프게 아는 것들이 참 많다.
어설프게 알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완벽히 알지 못하면서도 남에게 강요하는 모습도 종종 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을까?
어설프게 아는 것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또는 근거 없는 신념 때문에 재고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어설프게 아는 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적어도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라도 할 테니.






덧붙임) 위 실험실 이야기는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과학선생님께서 직접 겪으신 일화로 아이들이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하니 첫사랑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고 뚱딴지처럼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을 모티브로 제가 작성한 것입니다. 중간에 나오는 '나'라는 인물은 흥미진진함을 위해 1인칭 시점으로 말한 것일 뿐. 제가 아님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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