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르는 나의 어린 시절
어릴 때 여섯 살쯤
흙바닥에 나뭇가지 하나 주워다가 슥슥 평평하게 만들고선 별거 아닌 단어들을 주욱 쓰고 또 손바닥으로 북북 지운 다음 또 무언가를 쓰고 그랬던 적이 있다. 마치 요즘으로 말하면 전자패드에 전자펜으로 화면에 슥슥 그렸다가 스윽 지웠다가 하는 느낌의 아날로그 버전이랄까.
그렇게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연필이랑 종이, 지우개는 뭐 딱히 생각이 안 난다. 흙바닥이 종이가 되고 나뭇가지가 연필이 되고 내 손은 지우개가 되어주니 다른 건 필요 없다. 흙바닥에 쓰는 느낌도 참 좋다. 나뭇가지로 슥슥 거침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쓰다 보면 패인 홈 양옆으로 조그마한 흙 언덕이 만들어지는데 글자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고 입체가 되는 글자는 살짝 떠오른 듯 보이니 흙 언덕은 꼭 글자들의 친구 같은 느낌도 든다.
언젠가 친구 생일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는 도대체 내 평소 얼굴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나. 꽤 잘 사는 친구네 생일파티가 있던 날. 3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에 그 친구 부모님이 직접 설계해서 이층 집이었고, 아래층 위층 화장실도 따로 있고, 가족들 각자의 방이 하나씩 있었고, 거실 한쪽에는 피아노가 그리고 너른 마룻바닥에는 우리 집에선 상상도 못 할 슬리퍼. 그것을 신고 들어갔던 그런 집이었다. 푸세식(?)화장실을 자연스레 쓰던 나로서는 어린 마음에 저 집이 우리 집이었어야 해 하고 줄기차게 생각했었던.
여하튼 그 친구에게 초대받아 가야 하는 날이었는데 생일파티에 반드시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준비물인 생일선물이 없었다. 지지리도 못 살았던 우리 집의 형편을 다 아는 나는 엄마께 친구 생일에 가져가야 한다고 생일 선물 살 돈을 내놓으라 말할 수가 없었다. 불효와도 같은 말을 하는 대신에 열심히 집을 뒤졌다. 혹시나 선물할 만한 것이 있는지...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쓸 것도 없는데 선물이 필요하다고 한들 도라에몽이 요술주머니에서 뿅 꺼내 주는 것처럼 선물이 어디서 생기는 게 아닐 테니... 선물 찾기도 포기하고 선물이 없으니 생일파티도 포기해야 하나 하던 마지막 내 손의 분주함에 무언가 하나 걸린다.
일기장이다~!!
작년이었나?
학교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A4 사이즈보다는 조금 작은데 두께는 제법 되었고 그 시절 잇템인 조그마한 자물쇠와 조그마한 열쇠가 세트로 달려 있는 고급스러운 일기장~!
오우~ 예~~!!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생일 선물 사라고 돈을 턱 하니 내주지 못하는 엄마가 아시면 속상하실 테니 조그만 환호를 질렀다. 그리고 포장지로 보일 법한 종이로 예쁘게 포장을 하고 기쁜 맘으로 잠을 잤다.
그다음 날.
난 친구 집에 당당히 생일 축하를 하러 갔다. 뿌듯하게 보이는 생일 선물을 들고~!
선물은 받은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뜯는 게 제 맛이라 했던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거하게 차려진 생일상을 앞에 두고 열심히 맛난 음식들을 먹던 도중 생일 주인공인 친구의 선물 언박싱이 시작이 되었고.
이상하게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괘념치 않고 난 친구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웃고 있었는데~
생일 주인공이 날 요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한다.
"야~ 넌 니가 쓰던 걸 선물로 갖고 왔냐? 뭐야 이거~~ ㅎㅎ"
아.....!!!!! 이럴 수가...!!!
일기장의 맨 앞장에 글씨가 한 줄 써져 있었다. 나의 글씨체다...
작년 내 생일을 맞아 선물을 받고 너무 기뻐 일기장에 조금 끄적대다가 덮어놓은 걸 깜빡하고 잊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빨갛게 홍당무처럼 변해 버렸다. 얼굴이 이렇게 뜨겁게 변할 수가 있다니... 곧 화산이 폭발할 듯 뜨거워졌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주변 친구들의 시선들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 내 체격만 허락한다면 쥐구멍에라도 얼른 들어가 숨고 싶었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그 사건의 당사자인 나만 그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뿐, 다른 친구들의 기억에선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 것 같다.
나에겐 그 일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이제 곧 반백살이 될 텐데도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그저 추억이라고 생각하기엔 참 마음이 아픈...
며칠 전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이모한테 선물 받고는 기뻐서 환희 웃던 그 시절의 나 같기도 한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 모습이 문득 떠올라 이 밤에 그동안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꺼내 본 적 없던 이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