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학기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얼굴을 외울 겸 출석부의 명단을 주욱 부른 후에 늘상 묻는 질문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는데도 그 누구도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묻지 않는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운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또 황당한 질문들.
"편부 손들어~" "선생님~ 편부가 뭐에요?"
"아~ 너희 편부 뜻을 모르나? 다시~! 아빠하고만 사는 사람~ 엄마 없이~ 응~ 내려~" "이번엔 아빠 없이 엄마하고만 사는 사람~"
이제 막 6학년이 된 어린 나이임에도 부당하다고 느꼈던 그런 질문들이 연이어 나올 땐 한껏 썩소를 짓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딴에 나는 6학년 3반 반장이었고 따라서 담임선생님께 폐를 끼치면 안되며 반드시 도움을 드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써먹으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이상한 질문의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번 껄끄러운 질문들이 줄을 이었다.
"창문에 걸린 커텐 빨아올 사람?"
"교실에 둘 화분 가져올 사람?"
"육성회에 엄마 오시기로 한 사람?" ...
세가지 질문 중 못해도 두 개는 손을 번쩍 들었어야 하는데... 당연히 육성회에 오셔야 하는 건 물론이고, 화분이든 커텐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하는 나는... 반장이었다. 반장으로 뽑혔을 때 그냥 기권할 걸... 후보로 올랐을 때 애초에 못 한다 할 걸... 후보에 올랐어도 설마 내가 되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마니또같은 놀이기분이 들어서 내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해 볼까 했는데 덜컥 반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가시방석에 앉게 될 걸 알았으면 하지 않는거였는데 하는 후회만 밀려왔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나이 40대 중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그 당시는 김영란법이 없어서 촌지를 주고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린다며 엄마들이 학교로 상담 올 때는 항상 준비한 하얀 봉투. 그 안에는 세종대왕님이 열 분이 계신지 스무 분이 계신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선생님을 만나는 엄마들은 교무실에 선생님과 상담할 때 선생님 책상에 스윽, 선생님 책 사이에 스윽 봉투를 끼워넣었다. 담임선생님들의 형식적인 손사레는 참 적당했다. 절대 강하게 안 받겠다고 하는 선생님이 없었으며 학부모 상담이 있는 날에는 교무실에 왠지 모를 활기도 느껴졌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절대 단 한번도 나를 위해 학교를 가지 않으셨다. 나 뿐만 아니라 언니와 남동생까지 말이다. 남들 앞에 잘 안 나서고 내성적인 성격이셔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너희들이 학교 생활을 알아서 잘 하면 되지 엄마가 학교에 갈 이유가 뭐가 있냐고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쌈박질을 하거나 행여 학교기물을 훼손시켰거나 하는 그런 큰 일이 아니면 학교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게다가 아빠는 천리타향 중동에서 일을 하시던 상황이었고 엄마 혼자 우리 셋을 키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셨기에 학교까지 오라고 하기엔 참 염치가 없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남편도 없이 파트타임 일까지 하시며 가정대소사를 모두 짊어진 우리 엄마... 매번 버거워하시는 게 눈에 보였는데 화분을 사달라느니 학교에 와서 반대표 회장엄마를 맡으라느니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만만한 게 커텐을 빠는 거였는데 커도 너무 커다란 커텐을 3월 아직 서늘한 날씨에 따뜻한 물도 안 나오는 마당에서 차디찬 물로 힘들게 엄마더러 빨아 달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난 반장이었지만 허울만 반장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학년 3반 반장이었다. 담임선생님 입장에서는 내가 얼마나 미우셨을까. 좀 있는 집 자식이 반장이 됐다면 정년퇴임도 얼마 안 남은 당신 두둑하게 한 몫 챙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나를 참 원수 보듯 보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요새도 든다.
결국 나는 선생님이 요구한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들 수가 없었다.
반장 체면이 있지. 죄인처럼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었냐고? 아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선생님을 응시했다.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내 눈을 피하셨다.
나 왜 이리 당당하냐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뭘 잘 못 먹은 것 아니냐고? ^^
이야기는 거슬러 1년 전 5학년으로 간다.
5학년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잦은 이사로, 나는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세번이라는 이사경력 때문인데 이 또한 가난의 증거겠지. 여튼 친구들을 사귈 만 하면 전학, 또 사귈 만 하면 전학을 밥 먹듯 하니 친구가 전부인 그 나이에 점점 자신감도 잃고 말수도 줄고 성격은 소극적으로 굳어져 가던 참이었다. 이제 이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엄마 이야기를 믿고 서울에 있는 한 초등학교로 4학년 2학기쯤 전학을 오게 됐고 해가 바뀌어 5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초등학교 4년 경력인 내가 봐도 선생님 경력은 2년? 1년? 이제 막 오신 듯? 그런 느낌이 물씬 났다. 모든 것에 의욕적이고 적극적이고 항상 웃으셨고 밝으셨으며 목소리까지 산소같은 여자 이영애처럼 고우셨다.
일기를 열심히 쓰면 항상 빨간펜으로 짧게라도 의견을 꼭 남겨주셨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던 나는 일기장에 참 여러 이야기를 썼다. 가장 고민거리인게 가정사였던 것 같다. 매번 혼자 계신 엄마, 일 년동안 떨어져 있던 아빠가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가 또 다시 나가시면 또 일 년을 떨어져 계시기를 그렇게 십 여 년간 지내온 엄마가 너무 안쓰러웠고 가끔 경제적인 문제로 두 분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불화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느낀다는 전쟁같은 공포를 나도 느꼈던 것 같다. 그런 불안한 이야기들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마치 선생님께 SOS를 보내는 심정이었나 보다. 아빠의 작업복에 하얀 것이 묻어 있어 이게 뭔가 했는데 너무 땀을 많이 흘리고 뜨거운 햇빛에 바짝 말라서 소금가루 형태로 묻어 있던 걸 보고 놀라서 쓴 내용, 두 분 다툼 후에 극한 공포 때문에 죽고 싶었다는 내용 등 난 거리낌없이 일기장에 썼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빨간색으로 차분하게 의견을 적어주셨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애어른 같은 내가 안쓰러우셨던 것 같다.
그렇게 선생님과 내적 친밀감이 형성됐을 무렵 학교 외부 글짓기 대회가 있다는 공지가 있었다. 학교장 추천이든 엄마들 입김이든 이미 나갈 수 있는 학생은 정해져 있는 그런 대회라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다른 아이가 아닌 나에게 글을 써오라 하셨다. 당신이 추천해 주신다며... 열심히 글을 썼고 결과는 찬란했다. 성북구 구청장님이 주는 1등 상을 받았다. 멋진 트로피와 함께. 외부에서 받는 상은 학교에서는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야 한다. 월요일 운동장 조회 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내 이름이 호명됐다. 훈화말씀을 하시는 교장선생님만 오르는 교단으로 당당히 올라가 상장과 트로피를 받고 악수를 하고 내려왔다. 새로 제작한 우리 학교의 트로피가 아니라 잠시 반납했던 트로피를 다시 받는, 형식에 불과한 수여식이었지만 그래도 난 무척이나 뿌듯했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당당해진 내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그 이후에도 담임선생님은 과학실험을 주로 하는 학교별로 추천받은 어린이들만 모이는 연구회같은 곳도 다른 아이가 아닌 나를 추천해주셨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5학년 때 처음으로 혼자서 버스도 타보았다. 다양한 체험을 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학교와 집만 오가는 얌전한 나를 위해서 엄마들 지지가 가득했을 다른 아이들을 제쳐두고 날 추천해 주신 거였다. 그렇게 난 선생님의 편애를 온 몸에 받았다. 학교 수업시간이 끝나도 나는 교실에 남아서 선생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선생님이 수업준비를 하실 땐 그 다음날을 위해 선생님을 대신해 칠판에 판서도 도와 드리고 때로는 풍금도 치면서 선생님과 그렇게 친구처럼 지냈다. 난 그렇게 소심하고 말도 없고 조용한 아이에서 활달하고 밝고 적극적인 아이로 변화되고 있었다. 선생님의 편애 덕분에 말이다. 사실 편애라기보다 관심이란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난 선생님께서 소외된 한 아이를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해주신 거라고 확신한다.
6학년 말 겨울방학이 끝나고 방학숙제를 검사하는데 날 곱게 볼 리 없는 할아버지 담임선생님이 방학숙제들을 주욱 둘러보며 걸어다니다가 내가 공들여 만든, 이미 본 친구들도 감탄한 내 만들기 작품을 보시고는
"응~ 됐어."
라고 하시는 걸 듣고 너무 당황했고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잘했네~"가 아니라 "됐다."고? '네 것 따위는 볼 필요 없다.' 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난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조개탄이 들어있는 활활 타오르는 교실난로의 뚜껑을 열고 애써 만든 내 작품을 담임선생님 보란 듯이 꾹꾹 밀어 넣어 태워버렸다. 성질머리가 참 나쁘게 보일 수 있기도 한데 다른 의미로는 속으로 끙끙 앓고 속상해 하지 않는 대담함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토록 소심했던 아이가.
쉬는 시간이 끝나고 실내 전교생 조회 중 방학숙제 상을 수여하는 시간.
"다음은 방학 숙제 만들기 부분 최우수상을 발표하겠습니다."
흥, 분명 촌지 받은 아이들 중 한 명이겠지 하고 다른 짓을 하려고 꼼지락 거리려는데...
스피커에서는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얼굴이 벌개졌다. 난롯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벌개진 얼굴은 가라앉질 않았다. 촌지만 신경쓰고 더 못 받아 아쉬워 하시던 할아버지 선생님은 이미 내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까지 이미 지정을 해 둔 것이었다.
내게는 이렇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선생님이 두 분이 계시다. 한 분은 은사님, 다른 한 분은 그저 무늬만 선생님인 분. 사실 이영애 목소리를 닮은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코로나 이전인 3년전에도 뵙고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꾸준히 연락을 드렸다가 잠시 연락이 끊겼었는데 대학 다닐 때 선생님께서 고맙게도 먼저 연락을 주신 적도 있었다. 결혼식에 하객으로도 와 주셨고 작년에는 스승의 날을 맞아 내가 케익도 보내드렸었다. 벌써 정년을 맞으셨다며 "노는 게 이렇게 좋은거였니~" 하고 내게 농담도 하신다. 내일 모레 일요일이 되면 또 스승의 날이 돌아온다. 이번엔 케익과 함께 꽃도 준비해 봐야겠다.
선생님~~제게 무한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따뜻한 사랑을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처럼 항상 당당하고 밝고 자신감 있는 삶을 살도록 할게요.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