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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r 08. 2023

빗자루는 북극곰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

분명 식구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지면 "얼음" 동작을 유지했던 물건들은 숨겨놓았던 발을 쭈욱 내밀고 기지개를 켠 다음 소리 안나는 양말을 신고서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교준비물인 미니빗자루가 세트로 없어질 리가 없잖은가.

색연필, 사인펜, 종합장, 줄노트, 네임펜, 가위, 풀, 책꽂이, 파일 등등 모든 준비물은 다 챙겨 놓았는데 하나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학기 초부터 1년 내내 함께 생활할 담임선생님께 준비물도 잘 안 챙겨 오는 아이라는 첫인상을 심어 주긴 참 싫다.


이를 어쩐다.

물건을 바로 버리기는 망설여지고 혹시 쓸 일이 생기면 구제할 요량으로 잘 안 쓰는 물건이다 싶을 때마다 족족 베란다에 내다 놓는 남편이 떠올라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베란다를 살펴보니, 찾았다! 역시 있을 줄 알았지. 빗자루세트~


"다행이다~ 아들~ 어서 챙겨서 가방에 넣으렴~"

하려는데 빗자루 행색이 남루하다.

저런~! 귀퉁이가 아작이 났네.

손만 대면 부서뜨리는 늠름한 우리 딸의 마이나스의 손이 언제 또 쓰레받기를 해 잡쉈어~^^;;


큰 문제는 없다. 물건이 망가지거나 부서지거나 못 쓰게 될 때는 늘 출동하는 맥가이버 닮은꼴 서가이버님께 요청하면 되니까 말이다.


"여보~ 쓰레받기 귀퉁이가 금이 갔는지, 구멍이 났는지 이거 왜 이럴까~ 이것 좀 고쳐줘~"


하고 손에 쥐어 주고 나니 금세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누나가 썼던 거라 색이 너무 여성스러운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근데 아들~ 빗자루세트가 누나가 쓰던 거라서 분홍색이네? 괜찮겠어, 분홍색?"


"응~ 남자는 핑쿠지~~"

하고 쿨한 목소리로 말한다. ㅎㅎ 그래, 남자는 핑크지. ^^


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서가이버님이니 이제 거의 다 수리가 끝났겠지 하며 쳐다보는데


아이고... 아부지!

핑크 쓰레받기에 청테이프를 떠억허니 붙여 놓으셨네요? 그것도 칭칭? 쾌지나 칭칭 난다 아주그냥. 하아... 빨강에 초록은 보색이라며 크리스마스 트리같다며 우긴다 해도 핑쿠핑쿠 이쁜 색에 초록초록한 청테이프는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미적 감각이라고는 1도 없는 양반 같으니... 당연히 스카치테이프로 투명하게 붙이겠거니 해서 토스한 건데 이런 비주얼이라면 엿 바꿔 먹겠다고 엿장수에게 내밀어도 너무 요상한 색의 조합이라며 퇴짜 맞을 판이다.  


이제 와 테이프를 떼 보려 해도 오히려 떼는 힘 때문에 약한 플라스틱은 더 부서지고 말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준비물이 없어 준비성 없어 보이는 거보다 칭칭 감은 청테이프로 미적 감각을 상실하긴 했어도 가져가는 게 중요하지. 눈을 질끈 감고 아들에게 건네준다.


그런데 건네주면서도 영 께름칙하다. 요새 입만 열면 다들 학폭 이야기인데 원래 폭력이란 처음부터 그리 심각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은근한 차별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걸로 처음에 놀리기 시작하다 어처구니없는 위아래 서열이 정해지면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니던가.


괜한 걸로 친구들이 놀릴까 싶어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이걸 가져갔다간 대번에 친구들이 놀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새로 빗자루세트를 사러 나가자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분명 반 친구들 중 한 명쯤은 색깔이 튀어도 너무 튀는 빗자루 쓰레받기를 보고 기어코 물어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아들~ 친구가 만약에 야~ 너 쓰레받기 그거 왜 그렇게 허름하냐?

너 그거 살 돈도 없을 만큼 가난하냐? 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는 아들, 나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잇는다.


"쓸 만한데 이런 거 자꾸 버리고 새거 사면 북극곰이 살 수가 없게 되는 거야.

환경보호를 위해서 버리지 않고 내가 써주는 거야~ 하고 말이야."


아들은 감탄한 듯 "오~~~ 알았어. "

한다.



한데 아무래도 불안하다.

괜히 빗자루 하나 아끼려다가 아들에게 불똥이 튈지 모를 일이다.  


결국

걱정인형인 나는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바로 다음 날

미니빗자루세트를 하늘하늘한 색으로 하나 새로 사 왔다.


막상 샀지만 다른 고민이 또 하나 생겼다.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이용하자고 하지만 에코백의 경우 약 7천 번을 넘게 사용해야만 환경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걸 익히 알고 있어서였다.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면서도 새 물건을 샀으니 마음이 더 편치가 않았다.


자꾸 이렇게 새 걸 사면

소는 누가 키워. 소는.

아니,

북극곰은 어찌 살아. 북극곰은... ㅠ.ㅠ


북극곰아 미안하구나.

이번엔 내가 어쩔 수 없어 샀지만 꼭 반드시 다른 쪽에서 환경을 더 많이 아끼고 보호하도록 할게.

하고 다짐을 해 보았다.




아... 정말 미안해...  /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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