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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pr 09. 2023

남편, 시집가고 싶어?

그냥 하는 말인데 가만있으면 어떡해!

나는 요새 남편의 독립을 돕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주말이라 낮에 캠핑을 갔다. 연날리기, 캐치볼, 공차기까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모든 놀이는 남편이 하고, 나는 캠핑의자에 가만히 앉아 광합성하며 책만 읽다 왔는데 왜 내가 더 피곤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성장하는 딸아이 옷을 사느라 옷가게를 두 군데나 들러 이게 예쁠지 저게 예쁠지 눈동자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더니 그런가.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으나 그건 점심일 뿐이고 저녁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뭘 먹지 고민만 하는 중인데 실행력 만렙인 남편은 냉장고를 몇 번 여닫더니 순식간에 상차림을 하곤 저녁 먹자~~ 하고 외쳤다. "냉장고를 부탁해."프로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결혼 전에 어머님이 내 음력 생년월일에 태어난 시까지 하나하나 물어보셨는데 "야야~ 너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팔자라더라. 가만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온다 그러네? 그러니 뭐, 집 계약이든 뭘 할 때는 니 이름으로 계약해라~" 하셨는데 어디서 점을 보셨는지 참 용한 점집인 것 같다. 말년즈음 뒹굴뒹굴할 줄 알았는데 뒹굴뒹굴 시간이 이리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얼핏 김치볶음밥 비주얼인데 새우도 보이고 고소한 냄새도 물씬 풍긴다. 정체는 바로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봉구스 밥버거 두 개! 그저 볶기만 했을 뿐이라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속아 넘어갈 수 없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비밀"이란다. 궁금한 건 못 참는 내가 다시 물어본다. 그랬더니 별 특이할 것 없는 소금, 설탕이란다. 미원 조금 하고. 역시 비법은 미원이었군. 난 고향의 맛 "다시다"인데 "미원"인 남편은 나 모르게 미원을 사다가 냉장고 안쪽 구석에 쟁여놓기까지 한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리에 진심인 남편이군.' 하고 모른 척 넘어갔는데 이렇게 맛있게 감탄하며 먹을 정도니 나도 이제 미원으로 갈아타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맛있는 게 입에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남편에게 우쭈쭈 칭찬의 말을 건넨다.


"이제 자긴 새로 장가가도 되겠어."

예전엔 "시집가도 되겠어."라고 했는데 똑같은 말이 다소 식상해져서, 남자이니 갈 수 없는 시집 말고 "장가"라는 정통단어를 써보았다.

"응, 이제 뭐든 다 잘할 수 있어. 이게 다 자기 덕분이야."

라고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캠핑을 다녀왔는데 저질체력인 내가 손 놓고 있을 동안 모든 식기와 도구를 정리, 세척, 설거지까지 그것도 모자라 저녁까지 준비한 남편이 가히 할 만한 대답이다.

정말 할 말이 없다. 미안하고, 고맙고, 안쓰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좀 쉬었다 했으면 좋겠는데 내내 정리하던 게 떠올라 미안한 마음에 한 말인데 다 내 "덕"이란다. 평소 뺀질뺀질 집안일을 게을리한 대가(?)다.


좀 씁쓸한 마음에 다시 한번 더 묻는다.

"자기는 이제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겠네?"

물었는데 살짝 정적이 흐른다. 괜히 나만 기분이 나빠진다. 보통은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남편이 나서서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며 어서 "퉤퉤퉤"하라 해야 할 텐데 대사를 안 하길래, 그냥 내가 알아서 "퉤퉤퉤"를 했다.


남편을 정말 잘 키우고 있는 "나"다.

언제가 됐든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그날이 와도 이제 걱정은 없겠다.

에잇,

퉤퉤퉤.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떠오른다. 아직 아이를 둘만 낳았을 뿐이지만 하늘나라가 그리워 슬퍼하는 선녀가 너무 안쓰러웠던 나무꾼은 날개옷 숨겨둔 곳을 알려주고 말았다는. 날개옷을 입고 기쁨에 찬 선녀는 그동안 같이 살아온 정도 없이 아이 둘을 양팔에 하나씩 안고는 나무꾼을 버리고 매정하게 하늘로 가버렸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교훈을 얻었으니 조신한 남편이 어디 가지 못하도록 셋째를 하나 더 낳아야 하나 살짝쿵 고민이 된다. 에휴.



출처. 네이버 카페 "그림쟁이들만의 작은 공간" 에서 "후레쉬빔" 님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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