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라 낮에 캠핑을 갔다. 연날리기, 캐치볼, 공차기까지 아이들과 함께 하는그 모든 놀이는 남편이 하고, 나는 캠핑의자에 가만히 앉아 광합성하며 책만 읽다 왔는데 왜 내가 더 피곤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성장하는 딸아이 옷을 사느라 옷가게를 두 군데나 들러 이게 예쁠지 저게 예쁠지 눈동자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더니 그런가.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으나 그건 점심일 뿐이고 저녁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뭘 먹지 고민만 하는 중인데 실행력 만렙인 남편은 냉장고를 몇 번 여닫더니 순식간에 상차림을 하곤 저녁 먹자~~ 하고 외쳤다. "냉장고를 부탁해."프로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결혼 전에 어머님이 내 음력 생년월일에 태어난 시까지 하나하나 물어보셨는데 "야야~ 너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팔자라더라. 가만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온다 그러네? 그러니 뭐, 집 계약이든 뭘 할 때는 니 이름으로 계약해라~" 하셨는데 어디서 점을 보셨는지 참 용한 점집인 것 같다. 말년즈음 뒹굴뒹굴할 줄 알았는데 뒹굴뒹굴 시간이 이리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얼핏 김치볶음밥 비주얼인데 새우도 보이고 고소한 냄새도 물씬 풍긴다. 정체는 바로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봉구스 밥버거 두 개! 그저 볶기만 했을 뿐이라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속아 넘어갈 수 없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비밀"이란다. 궁금한 건 못 참는 내가 다시 물어본다. 그랬더니 별 특이할 것 없는 소금, 설탕이란다. 미원 조금 하고. 역시 비법은 미원이었군. 난 고향의 맛 "다시다파"인데 "미원파"인 남편은 나 모르게 미원을 사다가 냉장고 안쪽 구석에 쟁여놓기까지 한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리에 진심인 남편이군.' 하고 모른 척 넘어갔는데 이렇게 맛있게 감탄하며 먹을 정도니 나도 이제 미원으로 갈아타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맛있는 게 입에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남편에게 우쭈쭈 칭찬의 말을 건넨다.
"이제 자긴 새로 장가가도 되겠어."
예전엔 "시집가도 되겠어."라고 했는데 똑같은 말이 다소 식상해져서, 남자이니 갈 수 없는 시집 말고 "장가"라는 정통단어를 써보았다.
"응, 이제 뭐든 다 잘할 수 있어. 이게 다 자기 덕분이야."
라고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캠핑을 다녀왔는데 저질체력인 내가 손 놓고 있을 동안 모든 식기와 도구를 정리, 세척, 설거지까지 그것도 모자라 저녁까지 준비한 남편이 가히 할 만한 대답이다.
정말 할 말이 없다. 미안하고, 고맙고, 안쓰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좀 쉬었다 했으면 좋겠는데 내내 정리하던 게 떠올라 미안한 마음에 한 말인데 다 내 "덕"이란다. 평소 뺀질뺀질 집안일을 게을리한 대가(?)다.
좀 씁쓸한 마음에 다시 한번 더 묻는다.
"자기는 이제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겠네?"
물었는데 살짝 정적이 흐른다. 괜히 나만 기분이 나빠진다. 보통은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남편이 나서서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며 어서 "퉤퉤퉤"하라 해야 할 텐데 대사를 안 하길래, 그냥 내가 알아서 "퉤퉤퉤"를 했다.
남편을 정말 잘 키우고 있는 "나"다.
언제가 됐든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그날이 와도 이제 걱정은 없겠다.
에잇,
퉤퉤퉤.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떠오른다. 아직 아이를 둘만 낳았을 뿐이지만 하늘나라가 그리워 슬퍼하는 선녀가 너무 안쓰러웠던 나무꾼은날개옷 숨겨둔 곳을 알려주고 말았다는. 날개옷을 입고 기쁨에 찬 선녀는 그동안 같이 살아온 정도 없이 아이 둘을 양팔에 하나씩 안고는 나무꾼을 버리고 매정하게 하늘로 가버렸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교훈을 얻었으니 조신한 남편이 어디 가지 못하도록 셋째를 하나 더 낳아야 하나 살짝쿵 고민이 된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