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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눈, 코, 입

격렬한 이별

by 루시아

고3 때

학교 자율학습이 끝나면 또 사설독서실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거의 밤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서울 안암골 부근을 지날 때는, 이곳은 고려대 번화가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전쟁 같은 수능을 앞둔 고3 끝자락의 나로서는 그리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인데 저리 한가득 취하려고 대학엘 간 건가 싶다가도 그래, 초등, 중등, 고등 12년을 공부만 했는데 저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https://youtu.be/2mRwZbx_2yM




여느 때처럼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으로 가는 길.

로터리 가로등 불빛만 남아 어두운 길을 밝히니 빛이 닿지 않는 곳곳은 어둠이 깔려있다. 모퉁이를 돌아 바쁜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어스름한 곳에서 남녀가 싸우고 있었다. 대학생 느낌이 나는 그 남녀는 연인 느낌도 물씬 났다. 연인들에게서 느껴지는 느낌, 딱 꼬집어 연인인 이유를 대지 않아도 그냥 언뜻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그들은 연인이었다. 둘은 싸우고 있었다. 매우 거칠게.


전봇대 쪽으로 여자를 밀치는 남자, 그 남자를 두 팔로 온 힘을 다해 밀어내려는 여자. 주변 시선은 아랑곳 않고,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둘은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만일 정말로 헤어지려 하는 연인이라면 저리 힘들여 싸울 필요가 없을 터였다. 무관심이 극에 달한 커플이라면 말 한마디 주고받는 것도 무척 힘을 들여야 할 테니까. 그래서 그 둘은 서로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마음을 도로 가져오지 못한 상태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로의 마음이 사그라들까 봐 불안한 모습이다.



사랑의 불씨는 아직 남아 있지만, 그 불씨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꺼져가려 하는 상황인데 버티다 못해 지친 서로는 그만두자고 하면서도 쉬이 놓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성은 서로를 보내줘한다고 결론이 이미 났지만 감정은 보낼 수 없다고 포효하는 듯한 슬픈 싸움이었다.



그 슬픈 모습을 보며 돌아서는 고3인 나.

어리다고 하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다 컸다고 보면 또 다 컸네 할 나이. 뭐라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였다. 둘의 마음이. 격렬하게 서로를 원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애달팠다.




훌쩍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1년이 좀 넘었을까.

끝을 모르는 감성으로 가득한 나였고, 온통 이성으로 중무장한 남편이었으므로 우리 둘의 공통점은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노래를 좋아하는 것이 일치해서 참 다행이었던 남편과 나는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 노래 프로그램을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판타스틱 듀오에 태양의 노래 "눈, 코, 입"을 듣고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특히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 거 같아 찌릿함에 온몸은 전율했다.



처음 시작한 둘은 애틋했고 온 세상이 모두 자신을 위해 있는 듯 보였겠지.

그 둘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다른 모든 걸 다 버리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겠지.

서로의 마음만 있으면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세상은, 인생은, 현실은 있는 힘껏 그 둘을 방해했고,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지만 서로를 보내줘야 하는 그 둘.

보내는 게 맞는데 보낼 수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이 밤에 문득 그때의 전율이 떠올라 가수를 찾고 제목을 떠올리며 그 노래를 들어본다.





사진 출처. 블로그 솔직담백 신비의 리뷰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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