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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n 02. 2023

에코백과 사랑에 빠진 거니?

이제 그만 이별하면 안 돼?

손잡이가 너무 긴 에코백을 키 작은 아들이 들고 다니다 보니 가방이 바닥에 살짝살짝 끌려버렸다. 결국 에코백은 수차례의 쓸림을 견디지 못했고 바닥 양쪽 귀퉁이에 그만 "뽕뽕" 구멍이 나고야 말았다.


찢어진 청바지도 멋으로 입고 다니고 구멍 난 스타킹도 섹시하다고 일부러 사 신는 마당에 에코백 구멍이야 대수냐 싶었다. 양쪽 구멍 사이로 책이 빼꼼히 보이는데 맨날 실내에서 숨도 못 쉬는 책들이니 그런 식으로라도 바깥공기 좀 쐬면서 기분전환도 하려무나 하고 말도 안 되는 사람 취급을 괜히 좀 해주기도 했다.


한데 문제는 가방 안에 들어간 책들이 본의 아니게 에코백 가방 밑바닥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점차 책 귀퉁이는 시커먼스로 변했다.


사람 취급은 개뿔~!

꼴 보기 싫어졌다. 책도 가방도.


"에코백 새로 하나 사야겠다."


분명 나 혼자 중얼거린 혼잣말인데 어떻게 들었는지 아들이 다급하게 쫓아와서는 대답을 한다.


"안 돼! 북극곰이랑 펭귄을 살려야지~!"


"으응?? 아... 그건 그렇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심하든 말든 엄마의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다. 녀석...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동화책을 읽어 주면서 자연환경을 보호해야 북극곰이 살 수 있다고 구연동화를 너무 열심히 한 결과다. 하지만 큰 일이다. 누가 보면 '없이 산다고 저리 광고할 일이냐.' 할 만한 상황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우리 집이 없이 사는 건가? 아닌가? 원래는 비관론자였다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화한 내가 봤을 땐 우리 집에 뭐 없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뭐 없이 사는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다.


나의 체면을 위해 아들을 다시 구슬려 보지만 택도 없다. 아들은 이보다 더 단호할 수가 없다.


자신은 북극곰을 위해 절대 새로운 에코백을 살 수 없다고 한다.

에코백과 혹시 사랑에 빠진 건 아니지?


아이의 옷이 남루하면 사람들은 아이 흉을 보지 않는다. 남편이 입고 있는 셔츠가 구겨져 있어도 마찬가지로 다 큰 남자를 흉보지 않는다. 그 모든 욕은 집안의 안주인이 다 들어먹게 되어 있지 않은가.


아... 내 귀에 직접 들리지는 않겠지만 욕을 들어먹는 건 정말이지 싫은데, 도대체 아들을 설득할 다른 대사가 없다.


살짝 구멍이 난 것뿐인데 새 가방을 산다는 게 아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을 테다. 물론 아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청바지 하나 만드는데 염색, 워싱 등에 약 7천 리터의 물이 사용된다고 알고 있다. 에코백도 마찬가지다. 환경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에코백을 사서 사용하긴 하지만 이 에코백을 만드는 비용과 과정에서 진정으로 환경을 위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무려 7천 번은 사용해야 비닐봉지를 사용한 것보다 환경을 더 아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몇 번 안 쓰고 방구석에 방치하거나 버려지는 에코백은 오히려 안 쓰느니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한 적이 있었으니 이제와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처음 본 사람들이나

"어머! 가방에 구멍이 났는데 저걸 애를 그냥 들려 보낸다고?"

하고 욕하겠지, 뭐 벌써 여러 번 본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졌을 테다. 다행히 센터 영어가방으로만 쓰는 가방이라 센터 선생님, 친구들만 보는 가방이다.


원래 처음이 이상하지, 자꾸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법.



그래, 아들.

엄마 체면이 뭐가 중요하니.

자연환경을 살리는 게 중요하지.


누가 엄마 욕하면 뭐 어떠니.

북극곰을 살리는 게 중요하지.


누가 우리 집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오해하면 뭐 어떠니.

살만한 자연환경을 너희에게 물려주는 게 중요하지.


잠시 혹해서 에코백 새것 사려고 했던 엄마의 마음을 다잡게 해 주어 고맙다 아들~ ^^




구멍 난 곳에는 검은 천을 덧대어 오랜만에 바느질 솜씨 실력 발휘나 해봐야겠다. 어디선가 또각또각 다듬이 방망이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대문사진 pixabay

 다듬이질하는 여인 출처. 한점그리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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