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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n 30. 2023

후끈한 찜질방을 원한다면 식품건조기를 들이세요

그동안 나는 뭐였는가

어머님이 주신 식품건조기는 집에 있는 식탁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거다. 자신이 식탁인 척 가만히, 그저 가만히만 있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식품건조기는 발에 차이기만 할 뿐이라서 베란다 한 구석에 잘 놔두었는데 건조기는 혼자만의 숨바꼭질로 나름 잘 놀고먹고 있었다. 지난날 건조기가 없었을 때는, 나도 건조기만 있으면 별거 별거 다 만들 텐데 했었는데 막상 내손에 들어오고 나니 호떡 뒤집듯 마음은 변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추우니까 말린 이 먹고 싶을 때는 사다가 먹었고, 여름에는 너무 더우니까 찜기 같은 열을 발산할 그것의 전원을 감히 눌러볼 엄두를 못 냈었다. 하긴 뭐 핑계다. 겨울에 사용했다면 뜨끈뜨끈한 바람으로 따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든다. 그런데 장식용으로 전락해 버린 식품건조기가 빛을 보는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집안일 특히 주방일에 관심이 많아진 남편이 갑자기 식품건조기를 꺼냈다.

어머님이 잔뜩 주신 직접 키운 마늘 때문이었다. 마늘은 몸에 좋다는 것쯤이야 음식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뭘 어찌 만들어 먹어야 좋을지 알 길이 없어 하루 이틀 냉장고 안에 묵혀두었는데 남편이 행동개시를 했다.


마늘꿀절임을 해야겠단다.


건조기 층층마다 마늘은 얌전히 자리를 잡았고 드디어 건조기의 전원 버튼이 눌렸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과 아이들은 안방에서 자고, 난 거실에서 자는데 내 발 밑 자리에 위치한 식품건조기와 이 더운 여름에 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더위를 타는 이 몸뚱아리는 식품건조기가 밤새 돌아가느라 찜질방에 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러다 마늘과 함께 나도 같이 쪄지는 건 아닌지.


밤새 꿈속에서 이 찜질방, 저 찜질방 순회공연을 하다가 어찌어찌 잠을 자긴 잤는지 아침이 되니 눈이 힘겹게 떠졌다. 밤새 일했지만 아직 몇 시간 더 남아있는 건조기 타이머. 에어컨은 7월에 트는 거라고 못을 박은 남편의 말이 법이라도 되는 양, 다들 출근, 등교시키고 나 혼자 또 건조기와 함께 찜질방 코스프레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더운지 내가 꼭 마늘이 된 기분이다. 선풍기를 강풍으로 돌려보아도 뜨뜻한 바람이 나를 덮친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그냥 마늘이려니... 지금은 매우 추운 한겨울이려니... 해탈의 경지에 이를 지경이다. 일해라 건조기야. 나는 그냥 푹푹 쪄질 테니...


몇 시간이 흘러 드디어 식품건조기가 "저 인제 쉴래요. 일 그만할래요." 하는 아우성과도 같은 삑삑 소리를 힘차게 지른다.

더운 바람이 사라지니 이제 좀 내 숨이 쉬어진다.

나를 힘들게 한 마늘,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 꺼내 입에 넣어 보았다. 사각거리는 식감 대신 눅진거리는 식감으로 변했다. 그뿐.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

다 말라 살짝 쪼그라진 마늘을 보고는 마늘을 통에 담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꿀을 콸콸콸 붓는다. 이러려고 꿀을 큰 걸 사 왔던 것 같니 어쩌니 해가면서. 꿀에 푹 잠긴 마늘을 하나 꺼내 맛을 보니 달콤 달콤, 녹진녹진 마지막은 마늘 향이 은은퍼진다. 입이 심심할 때 한 개씩 먹으면 엄청 건강해질 것 같다. 딱 거기까지다.


그렇게 다 끝난 건가 했는데 남편이 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며칠 전 계속 춘장, 춘장 노래를 부르던 남편이었다. 이 냥반이 뭘 잘못 었나, 이상하다 했는데 결국 하는 말. 춘장을 볶아야겠단다.

볶은 춘장에 생양파를 찍어 먹으면 맛이 끝내 준단다. 뭐, 늘 먹는 양파가 춘장 하나 찍는다고 그렇게 맛이 끝내줄까.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키면 곁다리로 항상 양파와 춘장이 나오던데 이미 다 먹어봐서 아는 맛인데 고기도 아니고 뭘 저리 들떠서 준비를 하는지. 나의 시큰둥을 알아채지 못한 남편은 양파를 내리 연거푸 썰어댄다. 뚝딱뚝딱 프라이팬에 춘장도 볶는다.

그러더니 내게 하는 말.



이제 집에서 마늘도 먹고 양파도 먹고 그래~



뭔가 마늘장아찌 비주얼이지만 마늘꿀절임이다.

음...


음...


나는 뭐 집에서 마늘하고 양파만 먹뉘?

나 뭐 사람 만들기 대작전이야?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거면 그동안 나는 뭐였어?


왜 하필 마늘이랑 양파랑 하루에 다 몰아 만들어대서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거야.


난 곰인가.


갑자기 떠오른다.

단군 신화.


곰이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는 시련을 견디고 나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했었지. 그래, 이름도 곰스러운 웅녀였어. 곰 옆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엉겁결에 같이 시작했던 참을성 없는 호랑이는 며칠 못 버티고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동굴을 뛰쳐나갔지.


그래. 당신은 나를

그렇게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었구나.

그래. 그랬었구나.


근데 여보.

나 사람 되려면

저거 다 먹을 때까지 밖에나가면 안 되는 거야?




*마늘 사진은 직찍, 다른 사진은 pixabay

* 글은 식품건조기 광고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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