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Jul 16. 2023

안경아, 몇 발자국만 걸어 봐

몸이 천근만근이다. 

2% 남은 내 몸 배터리가 꺼져가기 전에 겨우 침대로 가 쓰러졌다. 

침대에 엎어져 꼼짝할 수가 없다. 그대로 잠들면 모든 게 완벽한데 아차차, 안경이 아직 내 얼굴에 붙어 있다. 


팔만 겨우 뻗어 안경을 베개 위 머리맡에 두었는데 이거 그냥 두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또 찌부짜부되어 후회막심일 건데... 작년 이 맘 때쯤 안경을 침대에 대충 두고 잤다가 온몸으로 누르고 잔 기억이 나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지금 얼마나 피곤한지 안경이 문제가 아니다.

요의가 느껴지는데도 몸을 일으키질 못하겠는데 안경 그게 대수랴.


이미 방을 밀대로 다 밀고 뒷정리까지 하는 남편에게 안경 이 귀하신 몸을 저 위에다 좀 둬달라고 말을 꺼내기는 참 염치도 없어 보여 입술만 옴죽달죽...


몸을 벽 쪽을 향해 반대로 돌아누우며


"여보.. 미안해..."


라고 말했다.

사실 내가 하려던 원래 대사는 


'여보..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방까지 다 닦아주고..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이 안경 좀 부탁해.'


였는데 차마 다른 말은 할 수도 없고 기운도 없어서 말 중간중간을 생략해 버렸더니 


"여보.. 미안해..."

가 돼버린 거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세로로 반을 가른 내 몸이 자기네들끼리 편을 먹어 상대편을 반드시 짓누르기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이놈의 몸뚱이는 또 금세 눌린 쪽이 배겨온다. 몸을 또 고쳐 반대로 누우며 혹시 안경이 깔릴까 곁눈질로 안경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데 응?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


히익! 벌써 안경을 깔고 뭉갰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니 멀지는 않지만 내 손이 닿지는 않는 선반에서 날 보고 빙긋 웃는 안경. 난 여기 안전하게 몸을 피신했으니 걱정 말고 푹 자라고 미소 지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휴우.

너, 발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거기까지 갔니? 


분명 당연히 남편이 가져다 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너무 신기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알아차린 남편. 

칭찬타임 시작이다. 



"여보!! 어떻게 알았어?

 나 사실 아까, 안경 좀 선반 위에 놔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못하고, 그냥 미안해라는 말만 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그랬더니 역시나 남편의 전매특허

"그냥."

하고 또 쿨하게 넘어간다.


이래서 오래 살면 말이 필요 없다고 하던가.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기쁘다.

기왕이면 예쁜 짓을 한 김에 "자기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안경이 보이길래 내가 치워뒀지~"라고 하나하나 조곤조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더 예쁘겠나 싶지만, 그랬다면 나랑 결혼했겠나. 더 훌륭한 여자랑 결혼했겠지. 


이렇든 저렇든 고맙다. 정말.. 

내 옆에 있어줘서. 

나에게도 조만간 오길 바란다. 

남편의 말 줄임 사이에 숨어있는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쿨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그때가. 



*이미지 출처.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