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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04. 2023

넌 내게 글감을 주고 장렬히 떠나갔구나

모나미 볼펜


monami=모나미

사실 띄어쓰기는 mon ami 로 써야 하는 "내 친구"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우리 어릴 적 100원짜리 하나로 살 수 있기로 유명한 볼펜.

영어로 정확히 말하면 볼포인트 펜(ballpoint pen), 편하게 우리 한국말로는 볼펜.

검은색만 주로 썼는데, 가성비가 월등히 뛰어나니 파란색, 빨간색도 곧잘 사서 세 가지 색으로 필통에 채워 넣어도 가격면에서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펜.

물론 이 녀석들은 열심히 써대면 중간에 땀인지, 똥인지 모를 뭉텅한 것들을 떨구긴 했지만, 그래도 이처럼 만만한 녀석들이 없어 늘 책상 위에 상비해 두고 썼었는데.


몇 달 전 아이와 서점에 들러 다양한 문구를 품에 안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딸아이는 역시나 필기감이 좋은 필기류보다는, 일자로 펜을 세우면 눈이 내리는 장식이 달려있다거나, 펜 꼭지에 돌고래가 달려 있다거나, 솜털같이 부드러운 뭉치가 달려 촉감이 좋다거나 하는 시각적으로 눈에 띄고, 촉각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것들을 고르기 바빴다.


나 어릴 때도 실용적인 것보다는 예쁜 디자인의 펜을 참 좋아했었는데 나이가 들어 시큰둥해진 건지 아니면 이미 사 본 적이 있어서 흥미가 떨어진 건지 이제는 예쁜 쪽보다는 글씨가 종이에 잘 나가는(써지는) 필기구나,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 좋다거나 하는 필기구에 더 눈길이 갔다. 문구를 몇 가지 골라 담고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리더기 옆에 놓인 모나미 삼 형제가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때 깜지라고 해서 똥종이라 불렸던 갱지에 모나미 볼펜을 열심히 써내려 볼펜이 닳아 없어지고 종이 여백이 점점 줄어드는 재미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향수를 불러일으킨 모나미 삼 형제가 자기들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내 눈을 놓아주지 않으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귀여운 가격이라 모나미 삼 형제를 얼른 집어 구매물품 맨 위로 올렸다.  


글이든, 메모든 열심히 써보마 하는 다짐으로 필기구를 몇 개 샀지만 역시 잘 쓰는 한 가지만 빼고 나머지는 서랍 안으로 들어가서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모나미 삼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빨강아, 우린 언제쯤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음... 그러게. 서점인지 문구점인지 알 수 없던 그곳에서 가정집으로 오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거기나 여기나 우린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나 봐.

아... 그렇게 된 거야, 우리? 우린 쓸모가 없어지고 만 거야?

우릴 찾지 않으니 쓸모가 없어진 거지 뭐.

히잉... 나 아까부터 목이 너무 마른데, 넌 안 그래?

난 사실 목마른 지는 꽤 됐어. 별 방법이 없으니 그냥 참는 거지 뭐.

이렇게 목이 마르면 안 된다고 선배님들한테 들었는데, 우리 정말 이러다가 진짜로 쓸모가 없어져 버리는 거 아니야?

앗...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 생각했어... 우린 목이 마르면... 그대로 버려지고 말지도 모른다고...



어느 날 필기구 욕심이 많은 딸아이가 내 서랍을 열다가 모나미 빨간펜, 파란펜을 꺼내어 그것마저 자신이 쓰면 안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난 아직 쓰고 있는 펜이 있으니 그러라고 했는데 씩 웃으며 좋다고 가져갔던 딸아이가 금세 돌아와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 이거 볼펜이 안 나와."

"응? 이거 사서 한 번도 안 쓴 새 거라 안 나올 리가 없는데?"

"흐음.. 아무리 써도 안 나오던데?"

"어디 줘 봐."


빈 종이 위에 뱅글뱅글 열심히 원을 그리며 잉크가 나오길 기대했지만 아무리 그려도 써지지 않는다.

사 두고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한 빨강이, 파랑이...



불현듯,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펜 뚜껑을 열어 꺼내보면 잉크는 그득하게 채워져 있지만 너무 쓰지 않아 나오지 않는 볼펜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머릿속에 그득한 생각과 쓸 글들이 많아도 꺼내어 쓰지 않으면 굳어버려 나오지 않는 볼펜처럼 되는 건 아닌지 덜컥 겁도 났다.


수려한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다음에, 이다음에 하고 미룰 일이 아니라 조금씩 한 구절씩이라도 꼬박꼬박 써 버릇해야 막히지 않고, 마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빨갛게, 파랗게 색을 내며 제대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 너희들이구나.

당장 버리기는 너무 새것이라 거꾸로 좀 더 세워 두면 혹시 나오려나.

쓰이다 가면 좋겠다.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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