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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08. 2023

빨간 뚜껑의 위력

잡아먹힐 뻔

참이슬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추석 첫날 복분자 한 병과 이슬 한 병을 샀었다. "먹을텐데"의 성시경이 그랬다. 복분자만 마시면 너무 달다고. 하지만 복분자를 한 모금 마셔보니 술의 참 맛을 모르는 남편과 나의 입에는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달콤 그 잡채. 치명적인 달콤함에 쓰디쓴 참이슬을 섞어 달콤함을 순화시킬 생각일랑 아예 할 수 없었다.


며칠 지나 일주일을 잘 살아온 나에게 선물을 해줄 겸 혼술을 마음먹고는 안주를 시키고 냉장고를 열었다. 언제 자기와 함께 할 거냐며 날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는 참이슬 하나. 뚜껑이 빨간색(오리지널)인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초록 뚜껑(프레쉬)과 뭐 크게 다르겠나 하는 안일한 마음 반, 밑도 끝도 없는 용기 반으로 그것의 모가지에 붙어있는 뚜껑을 힘차게 돌렸다. 그리고 잔을 채웠다.


꼴록 꼴록

소리 한 번 청량하다.

첫 잔에만 들을 수 있는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소주를 마시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잔을 한 모금 꼴딱.

으음~ 초록 뚜껑과 비슷하게 달콤하기만 하구먼 뭐~

무척 쓸까 봐 살짝 염려한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달콤함에 마음속으로 "너~! 합격"하고 합격의 목걸이를 살포시 걸어준다.


두 번째 잔.

응? 뭐지~?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평소 내 주량은 한 병에서 한 잔쯤 모자란 정도의 주량인데 왜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거지 이상하네 하고 한 잔을 또 따랐다. 취기는 취기일 뿐 술은 여전히 달다. 또 홀짝 잔을 비웠다. 왜지? 혀가 꼬인다. 야밤엔 술을 안 마실 거라며 옆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남편에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말하는데 내 귀에도 분명히 거슬리는 나의 혀 꼬부라진 소리. 어후. 듣기 싫어.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런가. 성시경이는 소주를 맥주잔에다 칠 부쯤 따라서 꿀꺽꿀꺽 마시던데. 찬찬히 취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알딸딸 취해서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말에 설득도 됐었다. 음. 근데 이거 몇 도지? 그제야 병을 들어 도수를 체크해 보는데 울랄라~ 20.1도???


초록 뚜껑은 12도쯤으로 알고 있는데 20도면 거의 두 배가 아닌가.

기껏해야 초록 뚜껑보다 3도쯤 높겠지 하며 맘 편하게 대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하지만 이미 반 병 이상을 비워버렸고, 뭐 이 거 하나 다 비운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객기를 부리고는 끝내 병의 바닥을 보고 말았는데 내가 날 너무 과신했구나 하고 그다음 날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거다.

으... 온몸은 두들겨 맞은 것 같고, 급기야 마지막은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남편한테 횡설수설 이상한 소리도 몇 마디 더 한 것 같은데 완전히 끊겨 버렸다. 필름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한번 도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평소에 마시던 초록 뚜껑은 12도인데 20도가 넘는 빨간 뚜껑을 초록 뚜껑 마시듯 마셔버렸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초록 뚜껑 두 병을 마신 결과가 된 것이었다.


아... 이런 바보. 그래 난 바보였다. 마시는 중간쯤 도수를 알게 됐으면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술이 술을 부르고, 안주는 또 술을 부르니 멈출 생각은 전혀 못했다. 맥주라도 있었다면 갈아타는 건데 다른 술도 없는 데다 안주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지금 이 걸 쓰는 중에도 머리가 살짝 지끈거린다.


그런데 한편으론, 한 병을 마시고 두 병의 효과가 있는 거라면 가성비 면에서 정말 끝내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병의 가격만으로 빨리 취할 수 있으니까. 취하려고 마시는 건데 빨리 취하고 가격도 저렴하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50도에 가까운 고량주는 딱 한 잔만 마시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건가.


하루 종일 머리가 흔들려 침대에 자리보존하고 누워서는 남편이 해다 주는 밥과 반찬을 무슨 큰 일 한 사람처럼 따박따박 받아먹으니 이것처럼 미안한 게 없다. 남편은 골골대는 나를 보며 "오늘 한 잔 해야지?" 하고 물어 내 눈을 놀란 토끼눈을 만들고는 혼자 크득 웃는다.


이제 앞으로 금주다.

죽을 때까지 금주라고 하면 못 지킬 게 뻔하고

당분간 금주다.


아... 힘들다.




*다 쓰고 혹시나 내 기억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에 초록 뚜껑의 도수를 인터넷을 뒤져 다시 체크해 보니 16.5도라 알려주는 글을 발견했다. 내 기억 이거 뭐지. 12도라 생각하고 두 배도 아닌 걸 두 배라고 억지 부리며 다 쓴 건데 이거 어떻게 고치지. 지금 이 지끈거리는 머리로 고치기 힘드니 그냥 둬야겠다. 그러니까 결국, 3도 정도의 차이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아... 우선 잡시다. 여러분. 새벽 3시에 지금 뭐 하는 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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