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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Dec 17. 2023

해도 해도 정리한 티가 안 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죽기 전에 알게 됐으니 다행인 건가

이 겨울에 제주를 다녀왔다.

겨울비가 내리다 못해 간간히 우박까지 내리는데 제주를 다녀오다니. 하지만 비 온다고 숙소에만 있을 수 있나. 2박 3일을 온종일 꿋꿋이 걸어 다녔더니 종아리에 오리알이 박힌 듯 다리가 당기고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다리가 아파도 여행을 다녀왔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여행 짐 풀기.


짐을 풀고 정리에 들어간다. 4인 가족의 옷(속옷, 외출복, 양말, 잠옷)이며 세면도구며, 핸드폰 보조배터리에, 충전기, 밤에 혹시 심심할까 봐 가져간 책에, 남편 면도기, 심지어 영어 숙제를 해야 한다고 가져간 막둥이 영어가방 등등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다.


호텔에 머물면서 괜히 집 생각이 났다.

우리 집은 사람 하나 없이 저 혼자 의연히 잘 지내고 있을까. 집에 아무도 없는 흔적을 들켜 혹시나 도둑이 든 건 아닐까, 필요 없는 콘센트 전원은 끈다고 껐지만 냉장고처럼 그냥 두어야 하는 콘센트에는 혹여 먼지가 들어가 막아서 불이 나는 건 아닐까, 도시가스 밸브는 잠근다고 잠갔는데 진짜 잘 잠갔던가, 평소 주야장천 틀어놓는 화장실 환풍기는 혹시나 사람 없을 때 화재가 날까 싶어 끄고 왔는데 담배 냄새가 흘러 들어와 집안에 냄새가 찌드는 건 아닐까, 나의 주특기인 안 해도 될 걱정, 하나마나한 걱정을 한 번씩 하며 지내다 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나의 고민은 무색하리만큼 집은 혼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포근하고 안락하기까지 해서 바로 기절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도 그럴 것이 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첫날은 실내온도 설정이 너무 높은 채로 그대로 두고 자는 바람에 한겨울인데도 더워서 헉헉대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날엔 온도 조절은 잘했는데도 너무 건조해서인지 모자란 것 없는 공간인데도 왠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늦은 시각 집에 돌아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역시 잠은 집에서 자야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몸이 개운했다. 작년에 동해 여행에서 숙소 베개가 너무 높아 잠을 설쳤던 기억 때문에 이번엔 내 야트막한 베개를 챙겨 갔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개운치 않은 잠이었다. 여행이란 낯선 곳을 탐구하며 다니는 묘미와 평소엔 잊고 지냈던 집의 소중함도 함께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는가 보다.


여행에 가지고 갔던 짐을 풀어 원래 자리에 두려고 몸을 일으켰다.

겨울인데 눈이 아닌 비 예보 때문에 인당 하나씩 챙긴 우산만 벌써 네 개다. 네 개 중 한 개를 톡톡 털어서 돌돌 말고 걸다가 현관 바닥에 여름 신발이 나와있는 게 보였다. 신발장을 열고 신발을 집어넣는데 조금 열린 서랍 안으로 다 쓴 본드가 굴러다녔다. 정리하던 우산을 내려놓고 본드를 들고 베란다 재활용 수거함으로 가서 플라스틱 재활용에 넣는데, 바로 옆에 다음에 쓸 거라고 끼워 둔 비닐장갑이 보인다. 왠지 너저분해 보인다. 마침 쓰레기통이 거의 찼네. 그 비닐장갑을 얼른 쓰고 버릴 생각으로 장갑을 끼고 쓰레기통을 비워본다. 영하 10도라 너무 추우니 입구를 묶은 쓰레기봉투를 베란다 구석에 살짝 내려놓고 문을 닫으려는데 베란다에 박스 채 둔 귤 중에 사망한 귤 몇 개가 눈에 띈다. 그대로 두었다간 옆에 멀쩡한 귤도 손잡고 같이 데려갈까 봐 완전히 가버린 애들 몇 개만 얼른 추려 꺼내 격리를 시켜 두었다. 황천길에 갈 귤의 물렁한 촉감이 내 손을 오염시켰으므로 얼른 주방으로 돌아와 거품비누를 펌핑하려는데 담가놓은 설거짓거리가 눈에 걸린다. 이럴 땐 거품비누도 아낄 겸 세제를 살짝 짤아 컵을 씻으면 일석이조다. 컵도 씻고 내 손도 씻고. 컵 두어 개 씻었을 뿐인데 투명테이프가 어디 있냐고 남편이 묻길래 테이프를 찾아주려 얼른 물기를 털고 다시 신발장 쪽으로 갔는데...


아이고...

접다 만 우산 세 개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우산을 넣다 말았으니 한쪽 문은 열린 채로 서랍도 열린 채로, 돌아보니 내가 들고 다니면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두고 다닌 정리를 안 한 옷가지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집정리는커녕 계속 너저분한 상태 그대로인 채.

 


어차피 집안 정리는 안주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 관리해야 하고 내 손을 모두 필요로 하는 것이니 이리 가서 이것 치우고 저리 가서 저것 치우면 결과적으로 모두 다 정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리가 되는 게 아니라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몸만 고단해질 뿐 점점 더 어질러지는 결과만 낳았다.


한 군데서 진득하니 정리를 모두 끝내고 다음 장소로 옮겨 정리를 또 시작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없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데 괜히 의욕만 앞서고 바쁘기만 한 나. 참 어리석다. 찔끔찔끔 건드리며 다 끄집어 놓을 일이 아니라 시작을 했으면 끝 마무리를 짓고 다른 일을 또 시작해야겠다고 이제서야 깨닫는 나다.





여행 가면 놀고먹으니 좋기만 할 줄 알았지?

학교에 제출할 체험학습 결과보고서를 쓰라 했더니 어서 놀고 싶은 마음에 막둥이가 날림으로 쓴 후 아무 생각 없이 숫자를 저렇게 덩그러니 써 놓았다. 보호자 2인에 학생 2인이라니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이게 뭐지... 잠시 바보처럼 멍하니 보다가 빵 터진 나. (다 아시겠지만 저 공간은 이름을 써야 할 자리다.)

이 나이 먹도록 정리하는 방법을 이제야 터득해 괜히 울적해진 나를 위한 아들의 개그인가. ㅎㅎ




*대문사진: 제주 구좌읍 비자림로 "메이지랜드의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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