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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Dec 11. 2023

"우당탕탕 캐논"이 좋아

완벽한 연주보다 즐겨 듣는 이유

여자중학교 1학년 무용시간.

무용의 "ㅁ"자도 모르는 우리 반 아이들 44명은 생애 처음 무용 시간을 맞아 마룻바닥으로 이루어진 무용실로 향했다. 운동장 조회대열로 각자 개인 공간을 확보하고 서서는 처음 받아보는 무용수업에 가슴이 설렜다. 하늘하늘한 살구색 무용복만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울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지, 폭이 넓은 검은색 스카프를 허리춤에 무심한 듯 묶어 사선으로 흘러내리도록 연출한 새침데기 무용선생님은 떡볶이에 환장하는 우리들의 워너비였다. 우리들 몸매는 그야말로 용가리 통뼈도 울고 갈 에스라인은커녕 굴곡조차 없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무용 시간이라도 열심히 몸을 움직이면 무용 선생님의 아름다운 몸매처럼 될 수 있을까 기대만 가득했던 그때.


모두 숨을 죽이며 선생님의 지시만 기다리던 중, 적막을 깨고 잔잔히 흘러나오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솔로곡 "캐논"


오며 가며 일부분만 들었었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을 기회가 없었던 클래식과 담을 쌓았던 우리들을 향해 선생님은 자신을 따라 하라며 동작 하나하나 우아함을 담아 움직이신다. "두~, ."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본 수업 들어가기 전 두 다리를 쭈욱, 두 팔을 쭈욱 늘리고 목도 부드럽게 원을 그리고 돌리면서 준비운동을 하자 캐논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더욱 살랑거리는 듯했다.  


음악은 참 힘이 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예전에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추억도 같이 재생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도입부에 필름이 흐르는 장면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눈앞에 흐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캐논을 들으면 중학교 무용시간으로 돌아가 스트레칭을 하던 나를 거울로 보는 것만 같다.


이미지 출처. tvN


최근에 들었던 캐논은 의사들의 청춘과 직업의 애로사항을 재미있게 풀어내 흥미를 유발했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였다. 다섯 주인공이 99학번으로 나오는 시대 배경이라(그래서 이 다섯 명을 한데 묶어 "99즈"라고 부름) 다소 올드해 보이는 화면 자체가 "응답하라"시리즈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각 회차 주제에 맞춰 밴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좀 더 인상적이었다. 조정석(리더, 보컬, 퍼스트 기타)이야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노래 분야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멤버들-정경호(세컨드 기타), 김대명(키보드), 전미도(베이스), 유연석(드럼)-이 이렇게 연주를 잘 해내줄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해서 더욱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들의 연주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신원호 PD도 처음에는 배우들에게 밴드 장면에서 핸드싱크를 시킬 생각이었지만 너무 열심히 하는 배우들을 보고 직접 연주를 하는 것으로 변경했다는 후문이다.



https://youtu.be/3oktkKNF7m0?si=hNjUxFwcyf8iv_nc

99즈가 캐논 연주하는 영상



멤버들끼리 합이 좋아 대충 흘려들으면 그럴싸해 보이는 연주이지만, 작정하고 매의 눈으로 영상을 들여다보면 연주 도중 실수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추어 연주란 모름지기 파닥파닥 날것을 보는 재미 아니겠는가. 


우선 첫 등장부터 정경호와 전미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시작하는데 그 모습은 흡사 "정말 자신 없어요. 지금이라도 저흰 도망가면 안 될까요." 하는 대사를 온몸으로 뱉는 것 같다. 이에 반해 조정석은 악보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마는데 이것쯤이야 난 다 외웠으니 악보 따위는 필요 없다 하는 몸짓 같다. 곧이어 연주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모두 알아챌 수 있는 정직한 삑사리(1분 41초)를 시작으로 잠시 후 조정석의 웃참(웃음 참기)이 시작된다. "이해는 가도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라는 대사로 빵 터져 일약 스타덤에 오른 조정석은 지금까지도 늘 유머러스한 연기를 해 왔기에 늘 웃상이라 표정이 원래 그런 것이겠지 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다시 이전 구간으로 돌아가 귀를 활짝 열고 들어봤다. 그랬더니 정경호의 버벅거리는 연주(2분 20초)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을 꾹 참은 조정석이었다. 바로 눈앞에 카메라는 돌아가지 연주는 막바지를 향해 가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으니 자신의 웃음으로 NG가 나서 멈춰버리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 입술을 앙 다물고 참고 또 참는 표정은 정말 봐도 봐도 재미있다.



게다가 빠른 스피드에 신나서 달리는 유연석의 드럼 뿌시는 소리, 김대명의 자신만만 키보드 뿌시는 소리로 전미도의 베이스 연주는 마치 핸드싱크처럼 보이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얼마나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본 공연에 실력이 발휘되길 간절히 원했는지 99즈의 표정(내 연주만 보이고 들리지 내 귀엔 지금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어요~)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완벽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 적어도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선물해 주니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감히 신성한 "직업"이라는 테두리 안에 넣는 건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서민들은 평생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고가의 화려한 옷을 입고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몇 곡 부르거나, 별로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 연기를 하고, 때로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시답잖은 얘기들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웃고 떠들던데 그걸 과연 직업이라 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가수지만 목 상태가 별로면 립싱크가 가능하고, 배우지만 위험한 액션은 스턴트맨이 대신해 주고, 말 그대로 연예인이 주인공이니 주인공 마음에 다 들게 해 주는데 과연 직업이라 칭해도 되는 걸까. 그러니 실상 들여다보면 별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수입은 억대로 챙겨가는 걸 볼 때면 다른 직업에 비해 너무 날로 먹는 게 아닌가 불공평하다 생각했었다.


이처럼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입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떨떠름해했던 나의 사고방식에 최근 균열이 일어났다. 배우 박은빈이 "무인도의 디바"에서 가수 지망생 역을 하기 위해 실제 가수 지망생처럼 노래 실력을 갈고닦아 현업 가수와 견주어도 될 만큼 훌륭한 노래를 선보였던 것이다. 다분히 평범한 노래 실력을 가졌던 그녀가 약 1년 동안 꾸준한 노력으로 아이유의 3단 고음도 해낼 정도로 가창력을 키울 수 있던 것처럼 슬의생 99즈도 연습에 연습을 거쳐 이루어낸 성과라는 걸 알기에 드라마 슬의생 또한 더욱 호응을 얻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명품드라마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꼭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 결과물에 취해 안주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한다면, 그래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일을 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XZgiNnGB8m4?si=y-c4fb7R0Hq5bO7Q

Canon Rock - Jerry C cover by Laura Lace- 화려한 연주로 짜릿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호기롭게 시작은 했으나 매번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아 지칠 때, 포기란 놈이 달콤하게 손짓해 오면 그만 항복하고 싶어질 때가 온다. 그럴 때마다 따뜻한 위로와 웃음을 주는 99즈의 영상은 영상 자체가 선물 같아 고마워진다.


화려하고 완벽한 연주보다 때로 "우당탕탕 캐논"이 더욱 듣고 싶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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