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Dec 19. 2023

술을 감춘 사장님

출처. 셔터스톡


제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폭설예보를 듣고는 혹시 결항되는 건 아닐지 조마조마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비행기에 내렸으나 공항에 주차해 두었던 우리 차에는 이미 함박눈이 10센티가 넘게 덮여 있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차를 덮은 눈더미를 쓸어내리고, 그새 접힌 채로 얼어버린 사이드미러가 엔진의 열기로 녹아 펴지길 기다렸다가 겨우 집으로 출발했다. 도로에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한 눈으로 미끄러웠지만 거북이 속도라도 차가 움직이니 긴장이 풀렸다. 긴장과 함께 맥도 풀려 저녁을 차려 먹을 기운도 없는 데다 허기까지 몰려왔다.  


집 근처에서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가자고 결정했지만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이라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었다. 마침 국밥집 간판이 보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에 딱 맞는 메뉴다. 뜨끈한 국밥 국물에 술 한 잔 생각이 절로 났다.


국밥집 문을 열고 우리 네 식구는 몸을 녹이며 주문을 했다. 신랑은 마저 운전해야 하니 나 혼자 마실 생각으로 속삭이듯 조용히 얼른 술까지 같이 주문했다.


청하 한 병 주세요.

그랬더니 여사장님이 술은 직접 꺼내먹는 시스템이라 했다. 아, 그래요? 하고 발딱 일어나서 술장고를 찾는데 투명한 유리창을 하얀 달력 종이로 모두 싸놓은 바람에 이게 술장고인지, 흰 벽인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사장님이 직접 오셔서 이거라며 손으로 가리키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분명 메뉴판에 술이 버젓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술장고를 꼭꼭 감춰두셨을까.


의아했지만 난 술장고와 숨바꼭질에서 이겼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한 병 챙겨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곧이어 남자 둘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모~! 이모~!" 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단골 느낌에 술기운까지 느껴졌다. 살짝 혀도 꼬부라지고 충혈된 눈동자는 이미 적당히 풀려 있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 1차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여기선 뜨끈한 국밥과 함께 해장할 겸 해장술도 마시려는가? 총각 둘이 부르는 소리에 사장님이 나와서 그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 둘음식 주문도 전에 술부터 주문했다. "참이슬 하나 주세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


내가 언제 술 갖다 주는 거 봤어?

직접 가져다 먹어.

직접 가져다 먹지도 못할 정도면 마시지 마.

그 정도면 마시지 말아야지!



와! 주관이 뚜렷하시고 철학이 돋보였다.

욕쟁이 할머니를 따라잡을 것 같은 강력한 포스지만 거기서 욕만 뺀 담백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여태껏 음식점에 갈 때면 늘 쉽게 주문하고 당연히 쉽게 음식과 술을 제공받았다. 업주 입장에서도 많이 팔면 팔수록 마진을 많이 남길 수 있으니 사장님은 더 손님들의 입 안의 혀처럼 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당연지사다.


한데 사장님은 술 안 팔아도 된다, 음식점이니 더구나 국밥집이니 어쩔 수 없이 구색 맞추려 두긴 두었다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권하지는 않으련다는 마인드다.


그깟 술 안 팔아도 된다. 그저 몸 건강한 게 최고다 하는 마인드.


술을 마시고 싶다면 직접 꺼내 먹으라는 배짱 두둑한 사장님.

대신 얼큰하게 취한 사람은 술장고 자체를 찾기 힘들도록 숨겨두는 지혜는 꽤나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땅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전봇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할 정도로 코가 삐뚤어지게 취했는데도

술 주세요

이 한 마디에 식탁 위로 너무 쉽게 가져다주는 술은 손님의 건강도, 업주의 정신 건강도 좋지 않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해도 해도 정리한 티가 안 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