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가장 무서운 말, 역류
마음 편하게 빨래하고 싶어요
안내 말씀 드립니다.
404동 2호 라인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세대가 있어 현재 702호에서 안방까지 역류가 되어 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파로 배수관이 얼어 역류가 발생하고 있사오니 한파 기간 동안 세탁기 사용을 자제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방송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우리 집이 속한 동에서 역류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저층도 아닌 꽤 높은 7층에서 역류가 되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참고로 우리 집은 8층이다. 까딱하면 우리 집도 역류로 인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지구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고 외치던 1999년도도 아니고 21세기에 들어선 2000년도에 20년에다가 3년씩이나 지나 급발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 최첨단 시대에 고작 "한파"로 세탁기에서 배수된 물이 안방까지 차 들어왔다는 게!
다행히 2호 라인이 아니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혹시 몰라 베란다 문을 열어 보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고요하고 얌전한 베란다가 어쩌면 그리도 고맙던지. 역시 사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소엔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야 그 고마움을 깨닫는다.
사실 어제 세탁기를 돌리지 못해 투덜거리기는 했었다. 영하 15도의 한파라 해도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배관을 튼튼히 만들었어야지 하면서. 아파트를 혹시 날림으로 지은 건 아닌지 어떻게 한파가 오기만 하면 세탁기 사용을 자제하라는 방송을 할 수가 있는 거냐며 짜증을 냈다. 말이 좋아 "자제" 지 사용을 금지하라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난 세상에서 명령이 제일 싫다.) 빨래를 안 할 수는 없으니 빨래방에 가야 하는데 집에 세탁기며 건조기를 고이 모셔두고 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또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면 전기세와 물세는 미미하지만, 빨래방은 누가 공짜로 쓰게 해 주냐 말이다. 비용은 그럼 너네들이 대 줄 거냐? 애먼 스피커에 대고 심사 꼬인 혼잣말까지 나왔다. 그래도 어쩌랴. 나 편하자고 나 몰라라 세탁기를 돌렸다가 아랫집에 물이 역류한다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 무겁고 귀찮음을 불사하고 빨래방을 다녀왔었다. 한데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이 사달이 났다. 역류 피해를 입은 세대는 이 추운 날 거실과 안방까지 들어찬 물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났을까. 게다가 깨끗한 물도 아니고 세탁기에서 나온 물이니 아... 잠시 내가 당사자라 상상했더니 진저리가 쳐진다.
일주일 전만 해도 영상 20도까지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다가 급작스런 한파로 영하 15도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심각한 기후 변화를 뜻하는 것이고 지구가 많이 아프다고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인간들이 당장 편하자고 하는 막무가내 행동을 여태껏 참고 참아내다 못 견뎌 지구가 내는 신음소리 같다.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인간이 돌려받는 것이니 뭐라 항변할 말도 없지만 대책 없이 이대로 지구를 마구 쓰다간 조만간 인류의 끝을 보게 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된다.
지구환경이 문제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만 편하자고 나 몰라라 세탁기를 돌리는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는 생각일까. 지구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제발 같이 사는 사회이니 남 생각도 좀 하며 삽시다!
얼른 이 한파가 좀 수그러들어야 할 텐데.
8층이라 역류에 대해선 전혀 걱정 안 하고 살았는데 이제 긴장하며 살아야 하나...
겨울이어도 맘 편히 세탁기 좀 팍팍 돌리고 싶다.
그리고 제발 우리 6호 라인에 사시는 가정들은 다른 가정에 피해 입히지 않는, 제발 배려심 많은 가정들만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본문 동호수는 실제 동호수와 다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