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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an 14. 2024

만년필아 미안해

부디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도구가 훌륭하다면 장인이 될 확률이 약간은 높아지지 않을까.

작가의 꿈에 1cm 아니 1mm라도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의 눈이 향한 곳은 바로 만년필!


사실 브런치 공간에서 글 발행이 가능하다는 메일이 온 직후 친언니는 내게 만년필을 선물해주려 했었다. 한데 나는 주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키보드를 뚜드려 팰 것이기 때문에 만년필씩이나 됐다며 괜찮다고 가뿐히 거절을 해줬었다. (언니 지갑이 날씬한 것보다 통통한 게 나는 더 좋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시간이 흐르니 글 쓰는 도구를 좀 바꿔보면 어떨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만년필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때 만년필이 있으면 아주 옛날 서양의 유명작가가 된 것처럼 만년필 꽁지에 깃털 하나 달고서 글이 술술 잘 써질 것만 같았다. 90년대나 종이에 글을 썼지 요새는 종이에 끄적이기보다는 키보드를 우다다다 두들겨 패는 날이 많지만 왠지 만년필이 있으면 내게서 작가 내음새가 조금 더 날 것만 같았다. 한 번 꽂히니 밤이나 낮이나 자꾸 만년필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마침 딸내미가 유일하게 플렉스 하러 가는 곳인 다이소를 간다고 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딸~! 만년필 거기서 봤다며? 얼마 하든?


천 원~


엥? 오천 원도 아니고 천 원?


응! 천 원이던데? 


고가의 만년필을 살 수도 있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처음엔 애지중지하며 아껴 쓰다가도 시간 가면 데면데면해지고 처음 마음이 유지되기 힘들어지는지라 만년필을 처음 접하는 초보 딱지만 뗄 요량으로 다이소 물건 하나 들고 오라고 돈을 건넸다. 천 원에 만년필을 얻을 수 있다니. 남편은 가격이 비싼지 여부를 판단할 때 자신에게 그만큼의 돈이 주어졌다고 가정하고 그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어떻게 만들겠니. 우리는 공장이 없고 따라서 생산라인이 없는데.) 아무튼 지간에 그러든가 말든가 돈 천 원으로 내 생에 처음 만년필을 얻을 수 있다니 가성비가 너무 좋다 못해 생산한 공장 직원들은 밥은 먹고사는 건지 살포시 걱정도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귀가한 딸의 손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만년필 하나만 들어 있대도 천 원이면 기절할 만큼 싼 가격인데 리필용 잉크 다섯 개가 얌전히 더 들어가 앉아있었다. 언빌리버블!


설레는 마음으로 얼른 포장을 뜯고 펜촉을 끼우고 수첩에 글씨를 써 보았다.


응?

안 나온다.

날이 추워서 잉크가 살짝 얼었나?


우선 세로로 세워두워야겠다. 잠시 다른 짓을 좀 하다가 다시 펜을 들어 글자를 슥슥 써보았다. 계속 안 나온다. 짜식. 새 주인 만났다고 수줍어 하기는. 이제 고만 나오지? 하고 다시 글자를 써보는데 여전히 안 나온다. 흐음... 너무 싼 걸 산 건가. 역시나 싼 게 비지떡인가...  쓱쓱 짧은 선을 반복하여 그어 보는데 잉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주인님, 부디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애원하는 것 같다.


오~~~ 좋아~


어쨌든 잉크가 나오긴 나온다. 스윽 나오는 느낌, 종이에 스윽 잉크가 퍼지는 느낌은 볼펜으로 글을 쓸 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요새 자주 쓰는 수첩에 글씨를 한 번 써볼까 싶어 한 글자 써보는데 으응? 글자가 나왔다 안 나왔다 한다. 이렇게 들쑥날쑥 나오면 곤란한데, 때로는 초스피드로 글을 휘갈겨 쓸 때도 있는데 잉크가 나왔다 안 나왔다 하면 생각했던 문장까지 다 까먹겠는 걸... 한숨이 난다.


안 되겠다... 넌...

그냥 책상 위 장식용이 되어야겠구나...





하루가 지났다.

장식용으로 두기로 했지만 미련이 남는다. 혹시나 하루 내내 세워둔 효과가 있을까 시험해 보고도 싶다. 에이, 괜히 만년필 쪽으로 팔을 뻗어 꺼내 들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살며시 종이에 썼다가 역시나 실망만 하겠지 싶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내 만년필과 눈만 마주치며 갖고 있던 볼펜으로 수첩에 글자를 쓰는데 응? 이젠 잘 써 왔던 볼펜도 안 나온다. 볼펜 수명이 이렇게 짧을 리가 없는데. 망가질 리 없는 볼펜을 들고 다른 종이에 동그라미를 빠르게 그려보았다. ! 아무 문제 없이 볼펜은 제 구실을 했다!


아...... 그러니까 펜이 문제가 아니라 종이가 문제였던 거였다.

그렇다면?

만년필을 꺼내 들어 수첩이 아닌 다른 종이에 조심스레 써 보았다.

아주 잘 나온다.


그제서야 나는 수첩의 종이와 새로 꺼낸 종이를 비교해 보았다. 수첩은 매끈한 재질로 되어 있고, 종이는 그보다 덜 미끈한 재질이었다. 자석의 N극, S극처럼 종이와 펜도 서로 궁합이 있는 거였다. 서로 당기거나, 밀어내거나. 만년필과 종이 그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만년필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유를 함께 의심했어야 했는데 한 놈만 계속 째려보았고 실망했고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만년필아.

내가 널 너무 오해했구나.

문제가 생길 때 한쪽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 준 너.

미안하다. 환영한다. ^^




*이미지 출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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