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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Feb 02. 2024

남편이 없다

드라마 '마의' 스틸컷


맨날 집구석에서 휴대폰만 쳐다보는 남편이지만 막상 집에 없으니 그 빈자리가 이리 클 줄이야.


2월 1일부터 교대근무로 바뀌었고 오늘은 야근하는 날이라 오후 5시쯤에 출근해서 달이 뜬 지금 이 시각은 우리 집에 어른이라곤 나 혼자다. 아이들은 밤 10시에 모두 잠자리에 들어 쌔근쌔근 꿈나라로 떠났고 홀로 자유시간을 만끽하는 중인데 평소라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를 텐데 오늘은 왜 이리 적응이 안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평소에 남편 옆에 딱 들러붙어 한쌍의 바퀴벌레 같은 징그러운 모습을 연출했다면 또 모르겠다만 남편은 거실에 나는 내 방에 따로 떨어져 있는 일이 다반사이면서 오늘은 정말 왜 이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한창 흥미로운 서사로 돌입한 내가 읽던 책도, 팡팡 터지는 게 재미있는 휴대폰 게임도, 다 보려면 죽어서도 끝내 다 못 볼 것 같은 무한한 영상이 뿌려지는 릴스도... 이 모든 게 다 즐겁지가 않다. 그저 어색해 죽을 지경이다. 원래 밤이면 조용한 게 당연한 일인데 쥐 죽은 듯 정적으로 가득한 이 공간도 참 견디기 어렵다.


내가 이리 의존적인 인간이었던가.

섬 생활의 유형을 혈액형별로 구분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MBTI가 대세던데 나 혼자 또또 옛날 사람 인증 중이다. 하지만 혈액형은 못 참지.) 섬에 혼자 표류하게 되었을 때 A형은 침울하고 우울해지며 구조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스타일이고, 그에 반해 B형은 집도 짓고 모래성도 만들고 여가시간을 즐기는 여유를 보이며 놀러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혈액형 중 나쁜 건 죄다 AB형이라 역시나 나쁘게 나오겠지 싶던 AB형은 웬일로 꽤 괜찮은 유형으로 알아서 적응을 하는 스타일이 나왔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고 생존일을 기록하는 등 순응하려 애쓰는데 아마 '무인도의 디바'에서 무려 15년간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냈던 박은빈은 극 중 AB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대망의 O형은 어떨까?

O형은 못 산다고 한다. 섬에서 혼자 살 수 없는 이유가 먹을 것을 찾는 게 서투르거나 의지가 부족하거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외로워서, 혼자라는 게 외로워 죽는다 한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땐 혼자서도 잘 노는 나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있는 지금의 나는 그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네. 저 O형이에요. 소심한 o형) 다행히 여기에서 조금 발전하면 외로움을 떨치려 허수아비를 만들거나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한다고. (그럼 배구공을 윌슨으로 만들어 친구로 지내던 톰 행크스는 O형이었을까.)


누가 보면 오늘 출근하여 야근 시작한 남편이 30박 31일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줄 알만큼 처량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는 거 나도 안다. 그래도 어쩌겠나. 속이 상해도, 화가 나도, 기분이 좋아도, 기뻐서 깔깔깔 웃음이 터져도 브런치에 글 쓰는 게 취미인 나는 늘 곁에 있던 남편이 현재 내 옆에 없다는 그 사실이 못 견딜 정도로 적응이 안 되는 큰 일이라 써야만 하는 걸.  


며칠 전 이승기의 삭제를 '소금'이라는 가수가 부른 영상을 온 가족이 있을 때 재생하여 같이 들었던 적이 있다. 이승기가 부른 원곡은 치기 어린 스무 살 남짓의 남자가 첫 이별을 겪고 아픈 이별을 마지막 한 장 남은 사진을 보며 애절하게 노래한 분위기라면 '소금'이라는 이 가수는 이승기의 애절과는 전혀 다른 애절로 다가온다.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가수다. 우선 딱 보자마자 방송사고가 아닐까 하는 의아함으로 계속 보게 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혹시 취중노래는 아니신 거죠?) 설마 하는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니 개그맨 허안나와 너무 닮은 모습에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노래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면 의자에서 일어나 멜로디에 몸을 맡기는 그 모습이 마치 고음불가 이수근의 모습도 잠시 떠올라 풋 웃음도 나온다. ('소금' 팬분들께는 죄송해요. 그냥 제가 본 느낌 그대로예요.)


오늘밤은 왠지 이승기의 삭제 한 번, 소금의 삭제 한 번, 들어야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아침 7시 조금 넘으면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인데 영영 떠나보낸 사람처럼 행동하는 나 정말 못 말린다. 오늘만 이럴 게 아니라 남편과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애틋하게 내려 노력해야겠다고 다짐을... 할 수 있을까? ㅋ



이렇게 글을 쓰며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고 시간도 좀 흘려보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인 밤이다.


같이 들어 볼까요.


이승기의 삭제

https://youtu.be/ayG9suYbVv8?si=1icwHw0gODGY5zMA


소금의 삭제

https://youtu.be/E8hCW9sBdbM?si=osCDzHBY09znO_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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