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두려고 거짓말을 했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일을 하면 확실히 하는 편이다.
내가 맡아 해낸 일을 두고 누군가 나쁜 평판을 내리는 것을 가만 듣고 있는 성정이 못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없는 힘을 쥐어 짜내어 일을 한다. 밖에서 나를 얼핏 바라본다면 대단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내게 주어진 모든 힘도 모자라 내일 혹은 내일모레의 힘까지 미리 끌어 와 오늘 다 써버리는 나는, 마치 매일 문 앞에 배달해 온 핫식스를 하루도 빠짐없이 입에 털어 넣는 꼴이랄까. 좀 대충 해도 사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텐데 태어나길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현생에선 택도 없고 아무래도 다음 생에나 고쳐질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좋게 말하면 주인 의식이 있는 거고 그저 그렇게 말하자면 욕을 들어먹기 싫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음식점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이하 알바)였지만 최소 매니저급으로 일했다. 가장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로 새로운 알바가 들어오면 백한 마리 달마시안을 하나하나 세듯 세세하고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주느라 밤양갱을 먹지도 않았는데 내 입에선 단내가 났다. 최고 고참인 나는 오픈이든 마감이든 어느 걸 맡아도 모두 완벽하게 일을 해내야 했으며 손님들의 컴플레인 또한 사장님이 쉬는 날에 사장님을 대신하는 나였으므로 그저 묵묵히 내 선에서 다 처리해야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5년이 넘도록 열심히 일했더니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잠시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에고고고'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늬만 아르바이트였지 매니저와 다를 바 없이 모든 일을 총괄했지만 바로 어제 들어온 알바생과 급여 차이는 단 1도 없는 허울만 좋은 자리에 앉아 일을 너무 책임감 넘치게 했더니 더 이상 끌어올 에너지가 없었다. 게다가 가게를 위해 애쓴다 한들 사장부부는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았다. 네가 그리 열심히 일해 봤자 결국 알바지 다를 게 무어냐 하는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제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직원이 사장보다 일을 너무 잘하면 사장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매우 똑똑하고 유능하고 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신하를 앞에 둔 왕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져 자신에게 꼭 필요한 신하를 어이없게도 제거해 버리는 것처럼. 일명 '나대지 마라 처형'쯤 되려나.
극초반에는 매우 열심히 했지만 점점 주인의식에서 알바의식으로 변화해 갔고 열심히 해봤자 돌아오는 것 하나 없는 그 상황에 내가 열심히 해야 할 동기는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그냥 알바는 알바가 할 만큼만, 주어진 시간에 더도 덜도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일만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자 하는 딱 요즘 MZ세대의 마인드를 닮아갔다.
코로나 불황을 맞아 손님이 없어 매상이 저조했을 때는 사장님과 머리를 맞대며 아이디어를 냈던 나였는데 "나는 가수다" 아니 "나는 MZ다" 마음먹었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척 맑고 상쾌하고 산뜻하고 홀가분했다. 그 어떤 것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 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휴우--- 하고 큰 숨을 내쉴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한 두어 달이 흐르고 결심했다. 일을 그만 두기로.
하지만 아무리 알바 마인드로 일을 한다 하더라도 하루 중 내가 일하는 시간 중에는 큰 트러블도 없었고, 주문량이 많아도 문제없이 해냈을뿐더러 무탈한 시간이 지속되게 해 주었으니 일을 그만둔다고 말할 때 나를 혹시 잡으면 어쩌나 고민이 생겼다. 태생적으로 거절을 잘 못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나는 거절해야만 하는 그 상황이 매우 미안하고 서로 곤란한 시간이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피차 마음 괴롭지 않게 단칼에 그만둘 수 있도록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사를 가기로.
그래서 사장님에게 말했다.
"저, 이사 가기로 해서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사장님은 당연히 나를 잡지 않았다. 평소 사장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직원들은 그대로 두고 가게를 인수하며 들어온 사장님이라 사장님보다 내가 더 아는 게 많아 일을 가르쳐드리기까지 했으니 시간이 흘러 일에 능숙해진 사장님은 이제 날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건지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잡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이사를 가니 잡더라도 잡힐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빠른 포기로 잡지 않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좀 아쉬웠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나. 일을 그만 둘 마음을 고쳐먹지는 않을 거면서 그래도 내게 그만두지 말아 달라 한 번쯤 붙잡는 대사를 듣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일 텐데 여러 상상을 펼쳤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사 가는 건 뻥이었어요." 하고 끝내 말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알바들이 무단결근했을 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내게 도와달라는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그동안 함께 보낸 시간들 참 추억이었는데 하는 마음을 표정에 담아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서자마자 산뜻한 발걸음으로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고단했던 기나긴 일이 마침내 끝났고 집에서 내리 푹 쉬며 방전된 몸을 충전해 가는데 문제가 생겼다.
집과 매우 가까웠던 그 음식점 앞 길은 이제 나에겐 이용할 수 없는 길이 되었고 갈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일 그 앞으로 태연히 지나가다가 사장부부와 딱 마주치는 날에는 내 이사 거짓말이 들통날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나는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빙 둘러 둘러 돌아간다. 원래도 운동을 안 하는 나이니 다리가 무척이나 아프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뿌린 씨앗이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러나 그만 둔지도 어언 3년.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고민된다.
내 집 앞인데도 그쪽 방향으로는 맘껏 돌아다닐 수 없으니 좀 아니, 많이 갑갑하다.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게 되는 날엔 그냥
도로 이사 왔다고 할까... >.<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