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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y 30. 2024

나는 가끔 오은영이 된다

개뿔 알지도 못하면서

출처. OSEN



"아이가 도통 안 먹으려 하고 밥에 관심을 안 보여요. 끼니때마다 쫓아다니면서 떠먹여 줘야 할 지경입니다. 스스로 밥을 먹는 좋은 방법, 뭐 없을까요?"


>> 굶기세요. 한두 끼 굶는다고 안 죽어요. 굶어서 배고프면 밥 먹지 말라고 해도 상차림과 동시에 밥상에 딱 붙어 앉아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해요. 공부를 해야 이다음에 커서 더운 여름엔 시원하게 일하고, 추운 겨울엔 따습게 일한다고 말을 해줘도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아이가 공부를 할까요?"


>> 공부가 하기 싫다는데 뭘 억지로 시킵니까? 소를 물가로 아무리 끌고 가봐야 소가 물을 먹나요? 목이 말라야 먹죠. 그냥 두세요. 지겹게 놀다 보면 나중엔 놀다 지쳐 공부 좀 해 볼까 하는 마음을 스스로 먹게 될 겁니다.


라고 나는 주변에 상담을 해주었다. 전문가도 아니고 상담가도 아니면서 대단한 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부모가 된 양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답인 듯 대답해 주었었다.


아이를 대할 때 너무 오냐오냐해 주거나 사고가 미성숙한 아이의 의견에 마냥 끌려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누군가가 내게 조언을 구해 오면 나는 마치 오은영이 된 것처럼 함부로 입을 놀려댔다. 그리고 어제 깨달았다. 그간 나의 행동은 내로남불에 지나지 않았음을...


바로 우리 딸아이의 전화 한 통으로.


"엄마... 어... 미안한데... 힝..."


하교 후 센터에 등원한 딸아이가 내게 전화해서는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하고 그저 엄마가 눈치채 주기만을 바라며 머뭇댔다. 보나 마나 들으나 마나 또 책이다. 또 교재를 집에 두고 안 챙겨 간 것이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번이 처음이라면 나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친절하고 상냥한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인 세상 온화한 보살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래, 그럴 수 있지. 사람이면 그럴 수 있어. 실수도 할 수 있고, 다음번엔 같은 실수 안 해야지, 다짐하고 또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은 능력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부주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 나도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세상의 모든 자녀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딸은 그럴 수 없어!!!



출처. 블로그. 누구나 웃으며 행복해하는 세상



자식의 부족함, 실수를 모두 안아야 한다는 그 이름도 거룩한 엄마라는 명찰을 단 나는 오늘따라 왜 그렇게 단호했을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이번이 한 세 번째쯤 되어도 잠시 한숨 내쉬며 그냥 넘길 수 있었을 테다. 근데 지금 한 여섯 번쯤 되려나? 바를 정(正) 자로 기록하며 손으로 꼽아 본 건 아니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뭐 그쯤 된 것 같다. 공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시험장에 필기구 안 챙겨 간 것과 진배없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총도 안 가지고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침에 분명히 다짐을 받았던 터라 더 그렇다. "오늘 영어든 수학이든 준비할 것 다 챙겼어?"라고 나는 재차 물었고 딸아이는 분명 "응~!" 하고 대답을 했는데 도대체 이 어미의 질문은 똥구멍으로 들은 건가 말이다. 대답이나 말던지.


딸아이보다 두 살 어린 아직 초등학생인 막둥이가 책을 안 가져왔다며 내게 SOS를 쳤다면 아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초등생이라는 면죄부가 있지 않은가. 한데 초등생도 제 물건은 챙기고 또 챙기고 잘만 챙겨 다니는데 중학생씩이나 된 녀석이 허구한 날 저렇게 덜렁거리고 다니는 게 한심해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전화를 해서 내게 통사정을 한다 해도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지난번에 엄마가 너의 실수를 포용하고 책 가져다주면서 뭐라고 했지?

다음번에 이런 일이 또 반복될 경우, 엄마는 절대 책 안 가져다줄 거라고 말했었지?'

하면서...

하지만 그게 되겠나.


아이의 곤혹스러운 목소리,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걸 어찌 냉정하게 외면하고 전화를 끊느냐 말이다. 센터 내에 복사기가 있긴 하나 센터는 쓸데없는 복사는 하지 않겠다는 방침인 듯하다. 책을 안 가지고 와도 절대 복사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깜빡 잊은 학생들은 스스로 책을 챙겨야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게 맞다. 한두 번 복사해 주다 버릇하면 책을 안 가져와도 복사해 주겠지 하는 마음이 무의식에 깔릴 것이니까. 그리고 길고 멀리 내다본다면 복사를 안 해 주는 게 올바른 행동이고 맞는 처사다. 책을 안 가지고 왔다고 해서 절대 책을 복사해 주지 않더라라는 인식이 자리 잡히게 되면 아이들은 교재나 준비물을 미리미리 챙기는 연습을 하게 되고 연습을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책임감을 키워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엄마인 나 또한 딸아이가 책을 잊고 안 가져갔으니 복사 좀 해 줄 수 없느냐고 센터에 요청할 수는 없다... 죽으나 사나 내가 가져다주는 수밖에.


다른 가정에서 자녀 관련한 문제점이 발생했을 땐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느냐 하며 아이를 위해서 단호하게 생각하셔라 마치 오은영이 된 것처럼 조언을 했던 나였지만 돌아보면 나부터도 딸 대신 책을 몇 번을 가져다주었는지... 이게 진정한 내로남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조언과 실천은 별개인 것인가.


역시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으로만 될 게 아니다. 나만의 육아법이 큰 가닥을 잡고 있다 하더라도 곁가지로 뻗어 나가는 수많은 경우와 또 그 가지에서 새순이 나듯 경우의 수가 자꾸만 생겨나니 매번 올바른 선택을 내리고 지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여러 과목 중 '단호하지만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이라든가, '약속을 잘 지키며 다정한 아빠 되기'라는 교과목은 없었고 따라서 관련한 내용을 배운 기억이 없다. 가사, 기술이라는 얼추 비슷한 느낌의 과목이 있긴 했으나 콩나물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공구로 국기함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미래의 좋은 엄마, 아빠가 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어디에서든 가르쳐 주지 않으니 이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깨우쳐야 하는 영역일 뿐이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니 이런 교과과목을 함께 가르치기는 힘든 것인가. 영어, 수학이 중요한 만큼 사람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텐데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오후 네 시 수업시간에 늦지 않게 부랴부랴 딸아이에게 책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미 책은 건네주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게 맞나 싶다.


책을 건네주니 딸아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기뻐하던지 모르는 어른에게 인사하듯 90도 각도로 꾸벅 내게 절하는 것처럼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나는 도끼눈을 치켜뜬 채 영어책을 건네주며 딸아이에게 또 지키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정말 책 안 가져다줄 거야!"


아이에게 한 말이니 이 말은 꼭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제발 엄마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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