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징그러운 바퀴벌레 한 쌍이 되어 쿠팡플레이에만 있는, 김수현, 차승원, 김신록 등이 출연하는 "어느날"을 둘이 오붓하게 봤더랬다. 이기지 못할 맥주 300cc를 흡입한 나는 새벽 3시까지 보다가 가물가물 꿈나라에 빠져들고 만 것 같은데 이 양반 하는 꼬라지(꼴 혹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내가 잠이 들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드라마를 더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자기 어제 몇 화까지 보고 잤어?"
"끝까지 봤지. 밤샜어."
"엥? 밤을 새웠다고?"
헙, 제정신이 아니다.
남편은 50줄에 들더니 여성호르몬이 나보다 더 많이 뿜어져 나오나 보다. (나는 갱년기에 접어든 건지 아침저녁으로 체온이 급 올라가 손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그렇게 화끈거릴 수가 없다.) 액션과 스릴러를 주로 즐겨보던 남편이 웬만한 여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멜로드라마, 일상드라마, 가족드라마에 빠져 산다. 쿠팡이든 넷플이든 확 끊어버리든가 해야지 이거 원.나는 드라마"어느날"을 몇 달 전에 이미 정주행을 마쳤기에 다 아는 내용이라 조금 시들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드라마를 본다고 밤을 새울 일인가. 곧 있을 내 생일 앞 이틀을 내리 연차를 냈다길래 뭘 하려고 그러는가 내심 기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탱자탱자 놀고먹고 보고 혼자만의 휴가를 보낼 줄이야. (기대를 말자.)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장면 장면 세상 모든 멋짐만을 보여주던 김수현인데"어느날"에서는 그 김수현이 이 김수현 맞아? 할 정도로 세상 찌질함의 끝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 대 초반 대학생이 어쩌다 보니 살인 누명이 씌워져 팔자에도 없는 감옥살이를 하며 강력범죄자들에게 린치를 당하기 일쑤니 온정신으로 살기는 어려운 상황이긴 하다.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천하의 김수현인데 어찌 저리 망가질 수가 있을까. 구부정한 자세, 흔들리는 동공, 어눌한 말투 이 삼종세트는 멋진 김수현을 찌질왕자 아니 찌질꼴뚜기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찌질함의 극치를 끝이 없이 보고 있자니 도대체 끝을 어찌 내려고 이러는 걸까 궁금해져 계속 보게 되는 드라마이긴 했다. 선량한 시민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저리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멀쩡한 인생이 나락으로 가는 건 정말 한 순간이구나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달까.
이미지 출처. 쿠팡플레이
그런데 같이 즐겁게 봐놓고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와 거실에 대자로 누워서는 잠을 자야겠다길래 필요하다는 안대도 가져다줘, 말도 안 한 베개도 자발적으로 가져다줘, 줄 거 필요한 거 조신하고 착실하게 다 갖다 주고 푹 자게 내버려뒀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투덜대?
남편이 금세 잠이 들고 코를 고는 걸 지켜보며 나는 늦은 아침을 먹고 애벌설거지 후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주방을 정리했다. 우리 집은 베란다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어 두면 맞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대는 위치라서 어지간한 더위는 선풍기도 없이 무척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 더위를 무척 타는 나와는 반대로 추위를 무척 타는 남편에게는 추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마침 선들바람에 남편이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새우처럼 말고 자길래 나는 활짝 열어 놓았던 베란다문을 꼭 닫아주고 얇지만 따뜻한 홑이불을 가져다가 얼굴 아래 어깨가 보이지 않게끔 시작해 발끝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선풍기를 미풍 회전으로 해 두고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두 시간쯤 잤을까.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는지 어설프게 잠이 깬 나는 브런치스토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안 떠지는 눈에 활자를 넣어주고 있는데 거실서 자고 일어난 남편이 투덜거리는 거다. 잠에서 덜 깬 내 귀가 점점 트여온다. 그리고 들린다.
"아니 이 더운 날 나 쪄 죽으라고 문은 꼭꼭 닫고, 이불까지 꼭 덮어준 거야?"
"옴마? 자기 아까 추웠는지 얼마나 몸을 오그리고 잔 줄 알아? 내 딴엔 추운가 보다 하고 신경 써서 이불 덮어준 거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