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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n 24. 2024

몽당연필과 볼펜의 만남

잘못된 만남? 잘된 만남!

그림 출처. 임지민 ‘마지막 연필 두 자루’(The Last Two Pencils·2021)



으흑 으흐흑 흑흑

어디선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요.

모두 잠든 밤

몽당연필이 혼자 울고 있네요.


지우개와 딱풀과 샤프가 몽당연필의 주위를 에워싸며 물었어요.


얘, 넌 왜 슬프게 울고 있니?


내 주인이 날 버렸어.

내 키가 작아졌다고.


저런, 작아져서 널 잡기 힘들었나 보구나.

사람들은 이제 무얼 오래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넌 생각보다 꽤 오래 쓰였는 걸?

손가락보다 작아졌으니 말이야.

몇 날 살지도 못한 연필 친구들이 가구나 냉장고 밑에 있는 블랙홀에 빠져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가끔 들었는데

물론 블랙홀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감감무소식인 친구들이 한둘이 아닌 걸 보면 분명 개미지옥과도 같은 연필지옥이 있는 건 분명해.


응. 나도 들은 것 같아.

그렇긴 하지만...

난...

키만 작아진 거지, 아직 쓸만한 걸?

이거 봐. 흑심도 온전하고 표면도 매끈하잖아.


그렇지만 손에 쥐기 힘들어졌으니 네 주인도 별 수 없었을 거야.


흐흑, 맞아.

이제 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나 봐.


그때였어요.

잠자코 듣고 있던 무리 중에 볼펜이 조용히 말했어요.


그래도 넌 온전한 면이 있긴 하네.

난 알맹이가 다 닳아서 써지지 않는다고 버려졌어.

겉모습은 아직 매끈해서 새 친구들과 나란히 서도 손색없는데

잉크가 나오지 않으니 별 수 없지 뭐.


그러자 무시무시하게 생긴 커터칼이 말했어요.


이야, 너희 뭔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커플 같아.

하나는 알맹이가 있지만 겉모습이 초라하고

하나는 알맹이가 없는 대신 겉이 화려하니 말이야.

이건 마치 소문이 자자한 옆동네 공구마을에 볼트와 너트 커플 같은데?


연필과 볼펜은 커플이란 말에 왠지 부끄러워졌어요.

볼트와 너트가 숨도 못 쉴 정도로 꼬옥 포옹한 모습도 떠올랐지요.


커터칼이 계속 얘기했어요.


우리 선배들은 옛날에 자동연필깎이가 없던 시절엔 연필 널 깎기도 했다는데

아~! 이건 어떨까?


칼이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어요.


내가 널 깎아줄게!


그게 무슨 말이야?

몽당연필은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아직 커플이 된 건 아니지만 잉크 없는 볼펜도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서서 몽당연필을 자기 뒤로 숨겨 주었어요.


볼펜 뒤에 숨어 고개만 삐죽 내민 채 뾰로통한 표정으로 연필은 말했지요.


지금도 가뜩이나 작아 외면받는데 날 더 깎아서 내 키를 더 줄인다고?


칼은 자신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온화한 표정을 지었어요.


내 말 들어 봐.

볼트 너트 그 애들을 떠올려 보라고.

내 생각엔 너희도 그렇게 아름다운 커플이 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이제 곧 이 세상과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볼트와 너트 그들처럼 커플이 될 수 있다면...

조금 무서웠지만 연필은 칼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칼은 연필의 뒤꽁무니를 능숙하게 착착착 깎아주었어요.

너무 많지도 너무 작지도 않게 딱 적당한 만큼만 도려내듯 깎았지요.


자, 이제 됐어.

이제 연필 너랑 볼펜 너는 천생연분이 되는 거야.


정말?


응, 기다란 몸이 필요한 연필 네가

알맹이가 없는 볼펜 몸에 쏙 들어가면

이것 봐. 몸이 길어졌지?


영원히 쓰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둘은 행복했어요.

볼펜도 연필도 자신의 쓰임이 더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요.

몇 달 아니 며칠이나 더 쓰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둘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바라보고 미소 지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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