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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n 12. 2024

내 생일케이크 내가 주문하기

조금 모양 빠지긴 하다만



에라 모르겠다.

무척 재미없는 일이지만

내 생일케이크를 내가 주문하고야 말았다.


알아서 혼자 잘 큰 남편은

혼자서 너무 잘 컸지만

그래서 혼자 크느라 바빠서

생일파티 같은 건 거의 해보지 않고 컸다고 했다.

그래서 "생일 그거 뭐 별거야?" 하는 생각이 점점 깊게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밥에 김치 하나만 놓고 먹었어도 엄마는 자식들 생일날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생일은 큰 기념일이라는 생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생일은 당연히 케이크가 있어야 한다. 한데 오후 5시가 되도록 남편의 엉덩이는 바닥과 한 몸이 된 지 오래고 남편의 두 눈은 지난 드라마(갯마을 차차차)를 보느라 TV 모니터에 고정되어 다른 곳을 볼 줄 모른다. 그러니 혹시나 하는 서프라이즈 따위는 없다.


그렇게 평소와 똑같이 특별한 일 하나 없이 오늘 하루도 저물겠구나 했는데 웬일로 남편이 "케이크 사러 나가야 하는데 어쩌지." 하고 한 마디 한다. 나 들으라고 하는 이 말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는데 '케이크를 사러 나가야 하는데'가 주요 내용이라기보다는 '사러 나가기 귀찮다'는 뒤의 생략된 말이 더 큰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급기야 나더러 "자기가 나가서 사가지고 와."라고 한다. 생일 맞은 당사자더러 생일 케이크를 직접 사가지고 오라고? ㅎㅎ 명을 재촉하는 말을 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잠시 목숨 9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양이로 보였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기쁘고 개운한 웃음이 아닌 썩소가.


뭐 이해는 할 수 있다. 나도 게으르기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게으름 끝판왕이니 남편의 게으름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집에서 저리 편케 있다가 밖에 나간다고 마음을 먹으면 눈곱도 떼야지, 옷도 입어야지, 신발 신으려면 허리 구부려 양말도 신어야지, 빵집까지 걸음 옮겨야지 이만저만 귀찮은 일이 아닐 테니.  


다 알지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귀찮음을 불사하는 것까지 포함한 게 내 생일선물이야."

말은 그리 했지만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15년 차 남편에게 기대할 거, 기대해선 안될 거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나도 케이크 따위 사러 가기 귀찮다.

너무 귀찮은데 사지 말까? 그래도 살까?

속으로 잠시 갈등을 하다가

생일 그까짓 거, 뭐 대수라고 사지 말자, 마음을 먹었는데...


음... 아니다!

얼른 핸드폰 어플을 열었다.

귀찮음을 대신해 줄 우리에게는 배달의 민족과 쿠팡이츠가 있지 않은가.  


케이크 주문을 했다.

30여분이 지나면 내가 힘들여 밖을 나서지 않아도 배달기사님께서 우리 집 문 앞까지 착! 가져다주실 것이다.


내 생일 케이크를 내가 주문하는 이런 모양 빠지는 일은 매우 속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건 오늘을 위한 거라기보다

미래를 위한 거라 할 수 있다.


다음 돌아올 생일날 나 혼자 헛헛해질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해 주문했다.


내가 나를 아끼지 않고

나의 소중한 날을 그냥 건너뛴다면

나중에 이다음에

소중한 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시간이 더 흘러

남편과 아들, 딸이 나를 떠올릴 때


"엄마는 케이크 없어도 괜찮잖아."

"엄마는 선물 없어도 괜찮잖아."

"엄마는 생일 같은 건 원래 안 하는 사람이잖아."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위해


케이크를 주문했다.





잘했다.

나란 녀석 :)





스스로 나를 달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표정에서 쓸쓸함은 말끔히 가시진 않았는지 남편이 케이크를 먹으며 신사임당 여러 장을 내게 쥐어주었다. 크으... 잠깐 쓸쓸한 보람이 있는데?

오늘도 서 씨들 길들이기 성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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