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야간근무를 갔고, 아이들은 내일 학교를 가야 하니 자러 들어갔고 그럼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바로 나만의 자유시간이 남았다. 아싸!
앞으로 주야간 교대로 근무가 바뀐다고 남편이 내게 알려주던 날, 나는 망연자실하여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때때로 멍을 때렸던 게 바로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남편이 없어 텅 빈 듯 생소한 집안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도 낯설지도 않다. 밥을 먹고 난 후 밥상을 바로 치우지 않아도 되었고, 설거지 대야에 그릇이 담겨 있지만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이 없으니 호랑이 없는 동굴에 여우가 왕 노릇하는 심정이 꼭 내 맘 같았을까 싶다. 일터가 순식간에 그저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놀이터로 바뀐 느낌이랄까. 사람은 어쩌면 이리도 적응을 잘하도록 설계가 되었을까.
이 달콤한 꿀 같은 시간을 흐르는 강물에 그냥 실려 보내면 너무 아깝지.
소박하게 혼술 타임을 가져보기로 한다.
맥주 한 캔과 요럴 때 먹으려고 찬장 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았던 오징어땅콩을 꺼내 소파에 등을 대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엇, 근데 내 왼쪽으로 거뭇한 뭔가가 스르륵 지나간다.
으윽, 벌레다...
집게벌레 모양을 닮았는데 기껏해야 내 작은 손톱 길이쯤 되려나. 어찌 들어온 거지? 갑자기 남편이 보고 싶어진다.
방충망도 모두 설치되어 있고 베란다 창 밑 배수 구멍도 남편이 모두 막아두었던 터라 어디 한 군데 들어올 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공동주택이므로 주기적으로 가가호호 방문하여 해주는 살충서비스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받고 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혹시 이것은 모든 위험을 다 이겨내고 사람 드나드는 현관으로 사람 따라 당당히 들어와 아예 집 안에 보금자리를 만들어작정하고 살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지금 한가하게 생각 따위 할 때가 아니다. 혼술도 살충 후에나 가능하다.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 얼른 잡으러 일어났는데 젠장.
그 흔한 파리채 하나 없다. 8층이라 낮지 않은 층수다 보니 평소에 모기 한 마리 없던 집구석이라 파리채가 필요하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았으니 구비해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종이컵으로 잽싸게 덮을까? 덮는 걸 성공한다 해도 이동시키기 위해 아래쪽에 받침용 종이를 넣었을 때 그놈의 미묘한 움직임을 내가 다시 느껴야만 하는 그 시간이 싫다.
두께 있는 책을 내리쳐 무게로 압살하자니 생물의 부분 액체화가 되어버릴 시신처리가 골 아프다.
머리칼을 빳빳하게 고정해 주는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면 벌레 요놈도 단박에 굳어져버려 벌레 살충엔 요즘 떠오르는 살충제라던데 집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는 멋쟁이가 없어 제품이 있을 리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놈은 100미터 달리기 종목을 1등 하고도 남을 바선생에 비교하면 그다지 움직임이 민첩하지 않다는 점이다.
남편도 없고, 남편이 없을 땐 아빠 대신 남자 흉내를 곧잘 내는 막둥이 아들도 잠이 들었으니 죽으나 사나 내가 잡아야 하는데 벌레라면 질겁을 하는 나라서 저놈을 잡고 처리하는 게 작은 일이 아니다.
잡기도 전에 벌써 으으으 싫어 죽겠는 신음이 또 입을 비집고 나온다.
어디로 도망가 버릴까 싶어 저것을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끈끈한 박스테이프.
저거다!
테이프는 이보다 더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수 있지.
쓰레기를 버릴 때 매듭이 잘 묶이지 않으면 위에 척 붙일 용도로 사둔 청색테이프, 회색테이프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우선 길이를 넉넉하게 하여 손으로 쭈욱 뜯어냈다. 뜯어낸 테이프를 가로로 펼쳐 조심조심 벌레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그 테이프를 벌레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가만히 재빨리 내려 붙였다. 어라? 다행히 한 방에 성공이다!
벌레뿐 아니라 거실바닥에도 일부 붙어버린 테이프를 살짝 뜯어 빼꼼 뒤집어보니 벌레 등부분이 테이프에 완벽히 붙었고 이놈은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는지 탈출하려고 여섯 개의 다리를 버둥거렸다. 관절 아니 마디의 유연함 좀 보소. 으으윽... 아무리 버둥거려도 등이 떨어질 리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초인적인 아, 얘는 벌레지, 초충적인 힘이 나와 등을 떼어낼까 싶어 그냥 둘 수 없다. 한쪽으로 길게 남은 테이프를 반으로 살포시 접어 샌드위치 덮듯 벌레의 배를 덮어주었다. 이로써 벌레는 등도 배도 끈적한 테이프와 한 몸이 되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의 탈주를 막기 위해 대충 벌레의 몸을 짐작하여 그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테이프를 꾹꾹 눌러주었다.
차마 그놈의 몸을 꾹 눌러 죽일 용기는 없었다. 오동통한 몸집이 꾸욱 눌려 터지는 그 느낌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벌레를 숨도 못 쉬게 꼭 껴안은 테이프 뭉치를 베란다로 휙 던져놓고 얼른 거실로 돌아와 앉았다.
또 벌레가 나오는 건 아닌지 내 주변을 괜히 둘러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는 시간을 틈타 벌레들은 자는 사람의 열린 구멍 특히 귓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하필 또 최근에 그것의 잔해를 귀에서 꺼내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서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밖에 던져놓은 벌레를 끈끈한 테이프로 둘러싸 고정만 시켰지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졸려서 잘 건데 저놈은 몸을 옴짝달싹 못하고 끈끈이에 들러붙어 이제 난 죽는구나 하고 떨기도 하고 체념도 하겠구나 하고 어처구니없이 벌레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그냥 콱 밟아 명줄을 끊어주는 게 저 자식을 도와주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은 나 너무 잔인한가... 잔인이고 나발이고 너무 징그러워 더 이상 손이든 발이든 못 대겠으니 뭐 어쩌겠나. 바선생은 밟으면 성체에서 알이 튀어나와 더 많은 벌레가 생긴다는 이야기도 들었기에 더 망설여졌다. 분명 그놈은 바선생은 아니었지만 밟기 싫어 우겨보는 내 변명이다.
아무튼 벌레 때문에 한밤중에 나 홀로 생쇼를 벌였다.
한방에 보내 주지 못해 짠한 마음, 테이프의 끈끈함을 기어이 이기고 나와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은 징그러운 마음이 혼재해 닭살과 함께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