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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Sep 12. 2024

집방문 노쇼는 괜찮은 거 아니야?

오늘은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반드시 청소를 해야 하는 날이다.

정기점검으로 정수기 코디님의 방문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석 달에 한 번씩 누추한 우리 집을 친히 방문하시어 우리 가족 식수의 수질을 책임지고 관리해 주시는 정수기 코디님.

오늘도 코디님 행차하는 날이 도래하였다.

청결하려 애는 쓰지만 행동은 않고 늘 온 마음을 다해 애만 쓰기에 몰아서 한 번에 치우느라 이런 날은 큰 각오를 다져야 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안주인으로서 자칫 태만한 마음을 먹으면 창피함을 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집 구석구석을 쓸고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구석구석은 신경 쓸 여력이 없고 눈에 띄는 커다란 것과 굵직굵직한 것부터 손을 대야 한다. 그래야 치운 티가 확실히 난다.


청소를 위해 저질 체력을 미리 충전해야 했건만 하필 오늘은 눈도 일찍 떠졌다. 그것도 새벽 5시.


고3도 아니면서 아직도 4당 5락을 실천 중인 나. 그렇다고 공부나 자격시험을 위해 늦게 자는 건 아니고 오로지 자유시간을 만끽하느라 늦게 잔 건데 새벽 3시쯤 잠들었다가 아침 7시 반쯤 일어나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는 패턴도 겨우 맞추다가 오늘은 어쩐 일로 5시에 눈이 떠졌다. 어제 딸아이 공개수업으로 평소 신지 않던 구두를 신고서 공개수업 이후 다른 볼일이 있어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새벽 1시가 되기 전에 뻗었던 게 이유였나 보다.




눈이 떠진 김에 밥 차릴 준비를 했다. 신혼 때는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밥도 따박따박 열심히 준비해 주었는데 어느새 결혼 15년 차가 되어 초심을 잃어버린 나를 돌아보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안 되겠다. 미안하니까 냉동고에 쟁여둔 가자미도 한 마리 꺼내어 굽고, 보글보글 된장찌개도 불 위에 올리고 밑반찬 몇 가지 꺼냈더니 다행히 그럴듯한 밥상 차림이 완성되었다.


눈 비비며 일어난 남편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난 나에게 어쩐 일이냐며 맛있게 밥을 먹었고 과일까지 챙겨 먹이고 출근을 시키고 나니 곧이어 아이들이 차례로 일어났다. 또 가자미를 꺼내어 굽고 두 번째 아침 밥상을 차렸다.


아이들을 차로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된 시각.

9시가 되기도 전에 밥상만 벌써 두 번이나 차렸더니 이 저질체력의 몸뚱이는 또 꾸뻑꾸뻑 졸음이 밀려온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잠깐 5분 졸다가 동물 맞히는 게임 한 5분 하다 또 5분간 멍 때리며 우리 집 천장에는 무슨 무늬가 있나 구경도 좀 하다가 이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발딱 일어났다.


설거지대야에 몸을 불리고 있는 적지 않은 그릇들, 맛있게 먹었음을 증명하듯 어질러진 밥상, 미쳐 버리지 못한 꽉 찬 쓰레기통과 여기저기 뱀 허물 벗듯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시쯤 오기로 한 코디님이 이 너저분한 꼴을 보면 안주인인 나를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나의 게으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른 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벌떡 일어나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하필 식기세척기가 고장 나 손으로 일일이 설거지를 끝내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왔는데 현관을 열자 아침에 생선구이 해 먹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환풍기도 켜고 냄새가 빨리 빠지도록 손을 썼다. 그러고 보니 신발을 둔 현관은 또 왜 그리 정신이 사나운지. 집에 지네인간이 사는지 신발이란 신발은 죄다 나와 있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것도 모자라 무거운 짐이 생기면 바로 사용할 거라고 카트까지 구석에 두었으니 복작복작 정신이 사납다. 우선 카트를 접어 베란다로 빼고 신발은 모두 신발장에 집어넣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와 현관을 깔끔히 쓸었다. 신발, 카트만 치웠는데도 입구가 훤하다. 집의 입구이자 첫인상을 담당하는 현관이 답답하고 복잡하면 복이 들어오려다가도 도로 나간다고 하던데 이참에 시원하게 비워두니 나갔던 복도 다시 들어올 것 같고 속이 다 개운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옷가지며, 정리가 안 된 주방과 식탁을 싹 정리하고 나니 금세 11시가 되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났으니 아직 오전인데도 벌써 6시간 동안 눈을 뜨고 있는 거구나.  



헥헥대며 소파에 앉아 삐질 흐르는 땀 때문에 살짝 갈등이 되었다. 에어컨을 켤 것인가 말 것인가. 혼자라면 어찌 버텨보겠는데 코디님이 오셔서 정수기 점검 하시는데 더우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이 든다. 미리 에어컨을 켜서 집을 시원하게 만들어 놓는 게 맞고 말고.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물건이 완벽히 제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언뜻 깨끗해 보일 거라고 마음을 편케 먹어본다. 원래 집안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도르마무 같은 것 아니던가.


청소할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가던데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더디 간다.


11시부터 11시 20분 사이에 오기로 해 놓고 초인종은 묵묵부답. 개미새끼 한 마리도 올 생각을 안 한다. 어찌 된 거지. 보통은 시간을 이렇게 잡을 경우 그 가운데 시각인 11시 10분쯤 초인종이 울리던데 우리 집 전의 일정이 조금 늦으시는 건가. 기다려 보기로 한다. 하지만 11시 20분에서 5분이 지나고 또 5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이런 서비스 후에는 고객만족도 조사를 하기 때문에 좀처럼 지각하는 경우가 없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계속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될 것 같아서 코디님에게 전화를 했다. 컬러링만 실컷 울리고 안 받으신다. 해당 사무소로 전화했더니 우리 집 담당 코디님이 병환 중이라 일을 그만두셨다고. 미리 전화드려서 일정을 바꿔야 했는데 미처 연락을 주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고 하신다. 이.럴.수.가.


병환이란 사유를 들었기에 웃는 건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난 그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저는 코디님 오신다고 해서 아침 댓바람부터 바쁘게 집 치우고 이제 끝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안 오신다 그러면 어떡해요~ 큭큭크크크큭"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원래 내가 아줌마처럼(나이와 여러 여건이 아줌마가 맞긴 하지만) 이렇게 넉살이 좋지는 않은데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치우고 돌아다닌 게 허무하기도 하고,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아무도 이 깔끔함을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게 너무 속상하기도 하고, 전화받으신 직원분이 나랑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 내 마음 알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 더 웃음이 크게 난 것 같다.


상담원은 '손님맞이 대청소 하느라 힘든 네 마음을 주부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 목소리로 나를 달래시며 진작에 미리 연락드려야 했는데 정말 죄송하다 또 한 번 말씀하셨다. 지금이라도 다른 코디님들에게 고객님 댁에 방문하라 하고 싶지만 이미 일정이 모두 짜여 있어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은 방문드리지 못할 것 같다며 거듭 미안하다 하신다.


아하하하하

이렇게 깨끗한 모습을 갖춘 바로 오늘, 우리 집에 오셨으면 하는 마음을 말 안 해도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신지.


어쩔 수 있나. 다음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기다렸다는 듯 뱃속에서는 꼬르르르륵.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남편과 자식들 밥은 정성스레 차려 먹였으나 나는 점심때가 다 되어가도록 청소에 시간을 쓰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


힘들게 청소해서 내내 허탈하지만 그동안 저희 집에 오가며 정수기 관리해 주셨던 코디님, 위중한 병이라 하셨는데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참, 벼락청소로 깨끗하게 탈바꿈한 우리 집의 이 모양새는 아무리 못가도 그래도 3일은 갈 것 같은데 어떻게 내일쯤 다른 코디님이 점검 오시는 건 안 될까요?

아, 일정이 모두 잡혀 있어 어렵다고요?

네네, 평소에 늘 깨끗함을 유지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집방문도 노쇼는 사절입니다.


아이고, 팔 다리 허리 어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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