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깍두기 아니고요~ 형님들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릴 적 고무줄놀이를 할 때 항상 불렀던 노래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이 노래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이 노래도 있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하는 살벌한 노래와 함께 여러 노래가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고 정겨웠던 노래는 단연 장난감 기차였다.
두 살 차이 나는 우리 언니는 그야말로 우리 동네에서 인기쟁이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우리 언니한테 사람들은 미스춘향 나가도 되겠다는 얘기를 할 만큼 예뻤고 또래 중에 키도 제법 커서 늘씬했으며, 고음은 끝도 없이 쭉쭉 올라가니 (커서도 노래 "고래사냥"은 식은 죽 먹기, 그 이후 팝송 "She's gone"은 아주 편하게 불러줬다) 노래대회에서 트로피를 휩쓸고, 그림도 잘 그려서 그림대회도 매번 나갔고, 운동실력도 상당해서 항상 운동회 날만 되면 계주에 1번으로 뽑혔었다. 얼굴도 예뻐, 키도 커, 노래도 잘해, 그림도 잘 그려, 운동도 잘해, 또 공부까지 잘 한 언니는 또래들의 워너비였으므로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럼 난 어땠을까?
언니에 비해 난 좀 평범한 편이었다. 얼굴도 특출 나게 예쁘지 않았고, 키도 크지 않고, 노래도 음치가 아닐 정도였고, 그림은 그저 따라 그리는 수준, 운동은 젬병이다. 초 1 운동회 때 100미터 달리기에서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같이 움직였다고 하니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할 지경이다. 우리 집 식구 중에 운동 못하는 사람이 없고 전부 다 달리기 시합에서 모두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희한하게 나만 못했다. 2등, 3등 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꼴찌...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내 흉내까지 내시며 친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신다. 온 식구가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어린 나이에 엄청 상처를 입었다. 하필 또 일고 여덟 살 무렵 그 당시 유행하던 괴소문인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말도 같이 들어서 난 한참을 어느 다리로 가야 내 친엄마를 찾을 수 있나 하고 고민에 쌓여 지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요새는 안다. 그 다리가 무슨 다리인지~ 하하. 동음이의어 실로 놀랍고도 짜증 난다.
아무튼 얼굴, 키, 노래, 그림, 운동, 공부 다방면에 만능인 우리 언니는 거기다가 마음씨도 예뻐서 나를 집에 혼자 두지 않고 친구들과 놀 때면 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른 나이 50세와 52세는 구분이 거의 안 되지만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은 어마어마하게 체격 차이가 난다는 것. 그래서 상대적으로 왜소할 수밖에 없던 나는 팀을 나눌 때 어느 팀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주로 깍두기를 했다. 깍두기는 확실한 소속은 없는 대신 매번 공격팀에 포함되었고 매번 재미있어 보이는 플레이를 같이 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심심할 틈이 없었다.
고무줄놀이를 재미있게 하던 어느 날.
검은색 고무줄과 고무줄을 잡아 줄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고무줄놀이는 3명만 모이면 할 수 있었고 사람이 많아도 상관없었다.
각 단계를 클리어할수록 고무줄 높이는 점점 올라간다.
처음엔 발목, 그다음엔 무릎, 그다음 엉덩이, 조금 더 높게 허리, 그다음 가슴, 어깨, 귀, 머리, 그다음은 가장 어려운 레벨 만만세였다. 하하~ 오랜만에 용어를 대려니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만만세는 고무줄 잡은 손을 하늘 높이 벌서듯 들어 올리는 건데 거의 이건 서장훈이 와야 고무줄을 넘을 수 있는 높이~ 그래서 꼬꼬마였던 우리는 재주넘기를 해야 겨우 넘을 수가 있는데 그 재주 넘기라는 건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휙휙 회전하듯 도는 거라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연하지~ 아니 유연했지... 다리도 막 일자로 찢어지고 그랬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루운동 체조선수가 곧 시합에 임하는 직전처럼 "도전~!" 하며 여태껏 고무줄을 넘지 못해 죽은 팀원을 살리겠다며 고무줄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고무줄과 도움닫기 할 바닥의 간격을 눈으로 다시 한번 체크해 본다.
자칫 잘못하다가 180도까지 회전하여 올라간 다리가 다시 역으로 되돌아올 수 있으니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조심조심 카운트를 센다. 세엣~~ 둘~~ 하나~~ 지금~!!
눈을 질끈 감고 잽싸게 재주넘기를 넘었다. 그리고 환호가 들렸다. 제대로 넘었다. 꺄악~!! 이 짜릿한 성취감이란~!
죽은 팀원을 모두 살렸다. 깍두기인 내가~! 참 뿌듯했다.
요새는 깍두기라는 게 있나...
아이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몸이 왜소해서 또는 능력이 부족해서 한 사람분의 몫을 오롯이 해낼 수 없는 아이에겐 "야, 넌 빠져."라는 말을 쉽게 해 버릴 뿐.
때론 깍두기도 초인적인 능력이 표출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더 모르는 그 능력이 그 깍두기 안에서 내가 나갈 타임이 지금일까 아닐까 웅크리며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