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뭔 도를 믿습니까 같은 소리냐구요?
기(氣)라는 한자의 유래를 보면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관찰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氣자는 气(기운 기)자와 米(쌀 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气자는 하늘에 감도는 공기의 흐름이나 구름을 표현한 것이다. 즉, 쌀로 밥을 지으면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수증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다. 이 한자는 현재에 이르러 '저 사람은 기가 세다', '기운이 괄괄하다'처럼 다양하게 쓰인다. 보이지 않는 흐름을 잡아다가 언어로 형상화하여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어진 걸 보면 언어란 참 대단하고, 강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의문덩어리인 나는 언어가 주는 강력함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특권의식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 동생은 태어날때부터 자폐증을 가지고 태어나서 모든 표현을 '좋다' 또는 '싫다' 아니면 '맛있다'정도로 의사를 표현한다. 나는 동생으로부터 받은 게 정말 많기 때문에 진심으로 동생의 행복과 평안을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구의 충족이 중요한데, 동생의 미묘한 표정과 몸짓으로 좋고 싫음의 퍼센티지를 가늠할 뿐이다. 최대한 쉬운 언어로 물어봐도 동생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동생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수사학적인 현란한 언어들이 존재하지 않는 외딴 행성의 외계인과 대화하는 느낌이든다.
동생과 살아온지 어언 29년, 나는 어느정도 몸짓과 표정으로 세상의 기운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동생으로부터 선물받은 감사한 능력이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형제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저 언어로만 표현된 단편적인 세상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양한 친구와 동료들을 만나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을 것이다. 만나고 나서 끈적한 액체가 뒤덮는 기분이 느껴지는 미묘한 사람. 만나고 나면 시원한 냉수로 세수를 한 것처럼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나의 표현의 도구가 언어라는 Tool 하나뿐이라 이렇게 언어로 표현하는게 아이러니긴 하다.
그래서 퇴사하고나서 나는 '언어'라는 네모난 틀밖을 벗어나고자 '그림'과 '음악'의 세계로 뛰어들어보았다. 무직백수에게 2만원 정도의 전시회는 좀 비싸지만 통신사 할인과 여러 청년혜택을 찾아보면 반값에 볼 수 있다. 늪같은 우울함에서 몸둥이를 한 발 한 발 꺼내어 전시회장으로 옮겼다. 내가 갔던 전시는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 외국인의 사진 전시회였다. 마케팅 회사의 힘든 업무에 치이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사진으로 구축해나간 작가이다. 결국 그는 퇴사하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회사일로 바쁠때 느낀 답답함, 부러움, 동경과 같은 감정들을 표현한 사진들을 보았을 때 난 깊은 공명을 했다. 동굴안에서 바깥의 자유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사진은 우리가 같은 슬픔과 희망의 파동으로 진동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뮤지컬을 지인 찬스로 봤다. 뮤지컬은 오케스트라와 뮤지컬 배우의 몸짓, 성량 그리고 무대 미술장치의 종합예술이다. 수많은 사람의 열정과 에너지가 합해진 무대이니 만큼 관객에게 전달되는 에너지도 매우 쩌렁쩌렁하다. 나는 섬세하게 관찰하고 실낱같이 흐르는 기운을 감지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라, 뮤지컬이나 콘서트와 같은 압축된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문화예술에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활동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와 다르게 뮤지컬 맨 앞좌석에서 넘버를 마친 배우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감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이기에 세상이 너무 단조롭지 않아 좋다.
수많은 전시와 문화예술을 접하면서, 지루함이 느껴졌다. 가장 신나는 문화예술은 창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동생의 청아한 미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내 동생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그림으로 많은 것을 표현할 줄 안다. 빈 공간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선의 단순함과 생략의 미학을 타고난 것 같다. 동생의 그림을 보면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하게 샤워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우연히 언어의 재능을 가지고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에 떨어진 것 처럼, 동생도 그저 우연히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언젠가는 언어로만 소통하는 외계인들이 동생의 그림을 보고 깨끗하고 맑은 기(氣)를 느낄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는 날을 소망한다. 동생의 첫 번째 후원자가 되기 위해 다시금 돈을 벌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