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절망을 버티게 해주지만, 치료제는 아닙니다
"환자분은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시긴 하니까요."
나는 이때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 삶이 약간의 파동은 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리드미컬한 평범함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냉철한 정신건강 전문의 선생님이 나의 삶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글에서는 잘날 척했다. 능동적인 삶을 찾아 회사를 박차고 나온 신세대MZ처럼 말했지만 퇴사이후에는 불안이라는 늪에서 발버둥치려고 공고를 찾아보고 다시 필기시험 공부를 하고.. 아둥바둥 애썼다. 아둥바둥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 나는 어느 새 1분마다 공고를 확인하고 일상생활에 집중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워서 도로의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다. 나 자신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별거 아닌 통증에도 부풀려서 죽을 병이라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걱정들, 나는 결국 어디에서도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 왱왱 메아리치는 '죽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시원하게 울고나서 지도앱을 켰다.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하고 예약을 잡았다. 정신과 예약을 잡는 건 정말 어렵다. 보통 대기 2주~한달정도 걸린다. 모든 정신과에 전화를 해서 이틀안에 방문이 가능한 곳을 찾아냈다. 나는 자기혐오의 고통이 내 몸을 뾰족한 가시처럼 찔러대서 너무나 아팠다. 얼른 상처를 치료하고 내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고 싶었다.
이틀 뒤 방문한 정신과에서도 어김없이 펑펑 울었다. 아픔을 스스로 말하는 것 자체는 정말 엄청난 치유가 된다. 의사선생님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시고 내 인생이 정말 힘들었을 것같다고,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오신 것 같다고 해주셨다.
응?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의아했다. 나 그래도 평범한 인간이지 않나?
나는 나정도면 평범하고 일반적이라는 생각을 왜 가지고 있었을까? 그것은 나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숨겨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긴 시간동안 타인과 스스로를 속이고 사느라,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지 오래인 셈이다. 나의 가정환경은 좀 특수하긴 하다. 어머니가 중학교시절부터 병환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동생은 발달장애인이다. 이런 나의 가정환경이 나를 정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수한 상황에 대해 보상받기 위해서 코피가 나도, 잠을 못자도 외부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속 자아를 너무 의식하다보니, 내부 자아의 고통과 괴로움은 저만치 밀어넣어두어 원래부터 없는 듯이 살아왔던 거다.
그리고 직장의 특수성도 기인한다. 부하의 뺨을 때려서 안경이 찌부라져 안구에 상처가 났다는 일, 회식자리에서 족발뼈로 상사랑 부하직원이 난투극을 벌인 일. CCTV사각지대라고 생각하고 여직원과 남직원이 즐겁게 피스톤운동을 한 일. 신혼이 얼마안된 새신부가 알고보니 사내팀장님과 불륜을 저지른 일... 이 모든게 내가 있던 업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업계가 좁아서 소문이 정말 빨리난다. 이런 일들이 블라인드와 뉴스로 하루 걸러 뜨다보니 뇌는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저건 좀 약한 썰이네~'하고 고통의 정도에 퍼센티지를 매겨 순위를 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겪은 폭언과 과도한 업무는 나에겐 100%로 느껴지는 고통이다. 자극적인 소식에 절여지다보니 '내 고통정도야 뭐..'하고 또 스스로를 덮어버린 것이다.
의사선생님은 나의 진단명을 말씀해주셨다.
"강박증과 우울증, 불안증이 복합적으로 있네요. 약 드셔보시고 일주일 뒤 내원하세요"
진단명을 듣고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신 듯 속이 풀렸다. 하지만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모든 일들이 다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아가진 않는다. 그냥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확인증을 받은 사실 이외에는 상황은 그대로다. 그래도 진단을 받은 것 자체는 나에게 큰 선물이다. 나의 진단명은 스스로를 노예로 취급하는 나쁜 착취를 뽑아낼 때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린시절부터 쌓아온 이 비교와 스스로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는 습관을 이제 바꿔볼때가 온 거다. 이건 의사선생님도 조언을 해주실 뿐, 치료의 주체는 아니다. 나를 따돌리고 소외시키는 걸 멈추는 주체는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