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할아버지 생신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친척할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때 부모님과 동행을 했던 나는 친척할아버지 댁에서 고모들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거실의 밝은 조명 아래서 흰색의 피아노 건반이 빛을 내고 있었고 청량한 피아노 소리가 내 귀에서 울렸다. 이전에는 무엇인가를 소망하거나 가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나인데 그때부터 피아노를 가지고 싶다고 열망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피아노 생각만 했다. 어머니에게 말했다.
"피아노를 사주세요."
어머니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달라고 해 주세요."
그리고는 밤잠을 잊고 밤마다 눈물을 훔치며 울었다. 나의 울음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에잇!"
하며 화를 냈다.
그렇게 며칠을 울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날 집에 가 보니 거실에 피아노가 있었다
"너 때문에 내가 할아버지에게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아니?"
하는 어머니의 말로 마음 한켠이 무거웠지만 피아노를 보자 뛸듯이 기뻤다.
어렵게 구한 피아노가 집에 들어온 날, 나에게는 신세계가 열렸다. 하루 먹거리 걱정에 여념이 없었을텐데 어머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 주셨다.
국민학교 5학년에 처음으로 바이엘을 배우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집에서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벅차 오르게 했다.
내가 다닌 피아노 학원은 개인 교습소였다. 동네에는 유명한 피아노 교습소로 두 곳이 있었는데 내가 간 곳은 집 부근 국민학교 선생님의 부인이 하는 교습소였다.
작은 연립주택의 방마다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아이들은 피아노 책을 펼치고 각 방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러면 피아노 선생님이 방에 들어와서 잠시 봐주고는 다른 방의 아이에게 갔다. 학교를 마치고 피아노 학원에 가면 학교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나의 친구는 아니었다.
난 욕심이 많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날마다 피아노 책을 씹어먹듯이 보며 연습한 결과 한달만에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교습소에서 피아노 선생님은 과외도 했다. 각 방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로 소음이 가득한 거실에는 늘 한명 내지 두 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거실 소파에 아니면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아니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읺고 교습소에 온 아이들과 어울려 놀거나 앉은 자리에서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피아노 선생님은 이따금씩 그 아이들에게 가서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써!"
라고 하고는 다시 방으로 갔다.
그 아이들의 엄마들은 아마도 피아노 선생님의 남편에게서 과외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 교사도 과외를 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내 동생은 학습 능력이 부족했다. 어렸을 때 뇌염을 앓고는 발달장애를 겪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동생을 보며 한숨을 짓곤 했다. 공부를 많이 시키면 동생이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학교를 마치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촌 동생들과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다. 그런 동생에게 어머니는 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매를 들기도 했고 심지어 말을 듣지 않는다며 동생의 옷을 다 벗겨서 추운 겨울 베란다 밖에서 벌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그 학교 선생님 집에서 과외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학교 선생님 과외라 과외비가 비쌌는데도 어머니는 동생을 그 집에 보냈다.
피아노 교습소에 과외하러 온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는 굳은 믿음으로 동생에게 과외를 시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과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마가지 않아 동생은 과외를 그만 두었다.
어머니는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셨다. 작은 집 베란다에는 늘 올망졸망한 화분들에서 자란 작은 꽃들과 제법 큰 나무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아무 멋도 없어 보이는 고무나무도 있었다. 어머니가 어느 날엔가 말했다.
"고무나무 잎이 떨어지니 새 잎이 나네. 가지치기를 해 주면 잎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
그리고는 어머니의 이 말이 다시 생각난 건 피아노 선생님 집 거실에 놓인 고무나무를 보았을 때였다. 나는 짐짓 아는 척하며 말했다.
"고무나무를 가지치기 해 주면 잎이 많이 나요."
그 말을 들은 피아노 선생님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아! 그래? 그럼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는데?"
슨간 당황한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는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고 한 말이라는 것이 탈로 날까봐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런데 모른다는 말을 하면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뭔가 잘라주는 것일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
"여기를 가위로 잘라주는 거예요."
라며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가위 모양을 만들어 고무나무의 새로난 순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래. 알았어. "
그 말을 듣자 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후, 피아노를 배우러 간 날, 피아노를 치는데 문 밖에서 들린 말소리를 듣고 나는 마음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 이 나무 잎이 왜 이래?"
그에 이어 피아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년이 이렇게 만들었어."
피아노 선생님이 이전에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내 귀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욕을 먹게 되자 마음에 멍이 드는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는 선생님의 이중적인 모습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