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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리한 호구 May 12. 2023

인생의 전체대본 보기

최근 인스타 광고에 직장인 뮤지컬 광고가 그렇게 많이 나오더군요. 수도원에서 했던 뮤지컬에선 무대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무대 앞에서 뮤지컬을 연기하고 노래하면 재미있고 황홀할 것 같았죠. 하지만 한편하고 끝나면 아쉬울 것 같아 연기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병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연기학원이 있더군요.



하루는 수업중에 2쪽짜리 대본을 받았습니다. 연극 대본이었죠. 청바지와 치마가 등장인물(?)인 '현수의 옷장'이라는 아동극이었습니다. 그 쪽대본만으로 청바지와 치마라는 인물을 설정했고, 그 대사만으로 파악한 것은 새침떼기이고 자존심 높은 치마와 약간은 어수룩한 청바지였습니다. 저는 치마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약간은 새침하고 청바지를 깔보는 듯한 마음으로 연기를 했죠. 그리고 나름 설정을 잘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시간에 선생님은 전체 대본을 주셨습니다. 제가 받은 대본의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청바지와 치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볼 수 있었죠. 전체 대본을 받은 저는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청바지와 치마의 사이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였거든요. 청바지는 옷장에 원래 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현수에게 사랑받는 청바지였고,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기 싫어하는 청바지였죠. 하지만 치마는 누군가가 입다가 버린 것을 현수가 주워온 치마였습니다.



청바지와 치마가 옷장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 속 '우영우'와 '권모술수'의 만남 같았습니다. 치마는 옷장의 많은 것이 신기하고 당연히 받아들여 질 것이라 생각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생각했지만 정작 원래 자리잡고 있던 청바지는 현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치마를 괴롭혀서 내보내려는 영악한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제가 쪽대본만 가지고 본 치마와 청바지의 관계와 정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깍쟁이는 청바지였고 제가 연기한 치마는 수더분하고 순진한 캐릭터 였던 것이죠.



이렇게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부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역사'라는 전체 대본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그냥 저 사람의 성격이 더러워서인지, 어릴적 받았던 상처가 건들여져 터져나오는 감정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죠.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겠죠. 같이 분노에 차서 쏘아보는 눈빛이 될지, 아니면 측은함에 눈물을 글썽이는 눈빛일지 말이죠.



이렇게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거나 주변 사람들을 보듬어주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철저히 나를 위한 이유이지요. 내가 그 사람으로 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나는 같이 분노할 겁니다. 하지만 내가 측은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그 상대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아이고.. 오죽하면 저렇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겁니다. 왜냐? 앞에서 화내고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그 사람의 역사를, 전체대본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건 지금의 모습인 쪽대본 뿐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오해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에 화를 내죠. 하지만 내가 못읽은 그 사람의 전체대본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저 인간은 왜 저러지?' 라고 화를 내는 것과, '나는 잘 모르지만 쟤도 힘들게 살아왔는 갑지..'라며 상대를 측은하게 보는 것, 이 눈빛의 차이는 같은 상황에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차이로 나타날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 사람 뒤의 거대한 전체대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누가봐도 내 잘못이 아닌데 나에게 짜증내고 닥달하는 상사를 볼 때 그 상사를 생각하며 같이 분노한다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할겁니다. 하지만 그 상사가 집에서 무시당하는 가장이라면..'쟤도 힘들것네..'라고 동정하며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긴 역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되고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덜 스트레스 받으며 성장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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