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스타 광고에 직장인 뮤지컬 광고가 그렇게 많이 나오더군요. 수도원에서 했던 뮤지컬에선 무대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무대 앞에서 뮤지컬을 연기하고 노래하면 재미있고 황홀할 것 같았죠. 하지만 한편하고 끝나면 아쉬울 것 같아 연기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병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연기학원이 있더군요.
하루는 수업중에 2쪽짜리 대본을 받았습니다. 연극 대본이었죠. 청바지와 치마가 등장인물(?)인 '현수의 옷장'이라는 아동극이었습니다. 그 쪽대본만으로 청바지와 치마라는 인물을 설정했고, 그 대사만으로 파악한 것은 새침떼기이고 자존심 높은 치마와 약간은 어수룩한 청바지였습니다. 저는 치마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약간은 새침하고 청바지를 깔보는 듯한 마음으로 연기를 했죠. 그리고 나름 설정을 잘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시간에 선생님은 전체 대본을 주셨습니다. 제가 받은 대본의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청바지와 치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볼 수 있었죠. 전체 대본을 받은 저는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청바지와 치마의 사이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였거든요. 청바지는 옷장에 원래 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현수에게 사랑받는 청바지였고,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기 싫어하는 청바지였죠. 하지만 치마는 누군가가 입다가 버린 것을 현수가 주워온 치마였습니다.
청바지와 치마가 옷장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 속 '우영우'와 '권모술수'의 만남 같았습니다. 치마는 옷장의 많은 것이 신기하고 당연히 받아들여 질 것이라 생각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생각했지만 정작 원래 자리잡고 있던 청바지는 현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치마를 괴롭혀서 내보내려는 영악한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제가 쪽대본만 가지고 본 치마와 청바지의 관계와 정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깍쟁이는 청바지였고 제가 연기한 치마는 수더분하고 순진한 캐릭터 였던 것이죠.
이렇게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부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역사'라는 전체 대본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그냥 저 사람의 성격이 더러워서인지, 어릴적 받았던 상처가 건들여져 터져나오는 감정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죠.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겠죠. 같이 분노에 차서 쏘아보는 눈빛이 될지, 아니면 측은함에 눈물을 글썽이는 눈빛일지 말이죠.
이렇게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거나 주변 사람들을 보듬어주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철저히 나를 위한 이유이지요. 내가 그 사람으로 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나는 같이 분노할 겁니다. 하지만 내가 측은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그 상대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아이고.. 오죽하면 저렇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겁니다. 왜냐? 앞에서 화내고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그 사람의 역사를, 전체대본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건 지금의 모습인 쪽대본 뿐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오해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에 화를 내죠. 하지만 내가 못읽은 그 사람의 전체대본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저 인간은 왜 저러지?' 라고 화를 내는 것과, '나는 잘 모르지만 쟤도 힘들게 살아왔는 갑지..'라며 상대를 측은하게 보는 것, 이 눈빛의 차이는 같은 상황에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차이로 나타날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 사람 뒤의 거대한 전체대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누가봐도 내 잘못이 아닌데 나에게 짜증내고 닥달하는 상사를 볼 때 그 상사를 생각하며 같이 분노한다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할겁니다. 하지만 그 상사가 집에서 무시당하는 가장이라면..'쟤도 힘들것네..'라고 동정하며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긴 역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되고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덜 스트레스 받으며 성장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