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국 영화 아니랄까봐-
요즘 미국에선 영화 좀 좋아한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플랫폼이 있다. letterboxd.
이 플랫폼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 4개가 곧 자신의 프로필이 되는데 영화배우들에게도 꽤 유명해져서 레드카펫에서 레터박스를 반기는 영화배우들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운영하고 있는 계정의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영화배우들의 최애 영화 4개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두명이나 고른 영화가 바로 마이크 리 감독의 네이키드 였다.
요즘 대세로 떠오르는 영화 배우 해리스 디킨슨과 제시 아이젠버그가 골랐길래 흥미가 갔는데 다행히도
왓챠에 있었다!(왓챠가 OTT중에는 제일 레어한 영화들을 많이 모아놓는 것 같아 좋다.)
1993년 영화라 좀 더 기대하게 된 것도 있었다. 옛날영화는 거의 실망 시킨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적인 생각으로) 영국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뭔가 정제되지 않은 날 것으로 가득 찬 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파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조니(데이빗 듈리스)는 거지 꼴을 하고 있지만 사실 놀랄 만한 통찰력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을 확실하게 가지고 살아가는 캐릭터다.
조니가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루이즈를 어떤 사정으로 만나러 오는 그 시점부터
그는 그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거의 떄려박다시피 그의 생각을 말로 쏟아내곤 하는데 그 양이란 게 대단해서 조니 역을 맡은 데이빗 듈리스가 고생 꽤나 했겠다 라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루이즈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솔직히 그의 마음을 밝힐 수 없던 그는 화만 잔뜩 낸 채 루이즈의 집을 박차고 나와 몇 일을 런던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 타인과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의 중추를 이루는 그들의 대화, 아니 거의 조니의 연설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대화를 듣고 있으면 마이크 리 감독이 조니라는 캐릭터를 통해 세상에 그간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마구 표출하는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왓챠 한줄평 중에 별점을 낮게 준 한 사람이 '마이크 리의 잘난 척 잘 들었다' 라는 뉘앙스로 평한 걸 봤는데, 뭐 누군가에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만 난 그렇지 않았다.
그 대사들이 하나하나 다 나에게 납득이 갔고 그래서 잘난척이라기 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흐릿한 생각의 덩어리들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준다는 느낌까지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이클 리의 영화에선 염세적 시선이 듬뿍 묻어있어서 염세주의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조니의 대사에 고개를 자주 끄덕거릴 지도 모른다. 그 중에 하나가 나고.
그래도 마이클 리 감독이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구나 라고 느낄 수 있는 건 마지막 장면.
조니는 가출(?)의 끝에 결국 가방을 잃고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기까지 한 후에라야 다시 루이즈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루이즈의 간호를 받으며 그는 다시 루이즈와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몸이 성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다시 집을 나서는 조니를 보게 된다.아직 온전치 않은 다리를 질질 끌고, 이른 아침에, 그는 다시 직진한다.
세상에 질릴 대로 질린 것만 같아 보였던 조니지만, 다리가 성치 않아 조금은 걷는게 더디겠지만,
특히나 이런 세상에서 절뚝거리며 걷는 건 힘들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바라봐 줄줄 아는 사람이 존재한단 걸 일탈의 끝에 깨달은 조니는
다시 걷는다.
*영국 억양 듣는 재미가 쏠쏠했고, raw(날 것)한 에너지가 가득 차서 즐겁게 볼 수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드물게 볼 수 있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마이클 리 감독의 철학이 가득 담긴 대사를 보고 다시 곱씹는 재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