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에세이는 마치 시.
조앤 디디온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특히 젊은 층들에게 요즘 다시 각광받고 있는 작가이다. 나도 사실 아직 그녀에 대해서 많이 아는 바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텍스트힙' 처럼
외국에서도 lit girl era라고 해서 '책을 많이 읽는 여자'의 이미지가 매우 인기인데 그 중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작가가 조앤 디디온이란건 핀터레스트를 조금만 봐도 알 수 있다.
도대체 어떤 것 때문에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모두 다 '조앤 디디온'을 외치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녀의 책 '상실'을 냉큼 구매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읽기 전 '외국의 MZ세대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은 책의 깊이보다 책의 표지가 이뻐서 또는 마케팅이 잘 돼서 인기가 많은 걸거야' 라는 나의 예상은 '상실'을 읽고 기분 좋게 뒤엎어졌다.
'상실'은 조앤 디디온의 에세이로 그녀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마주해야만 하는 비애,
애도, 상실을 소화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내용적으로 가장 먼저 생각 난 건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내가 기억하는 바로 가장 골자였던 부분은 바로 내가 아닌 상대방의 슬픔은 절대 맘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슬픔을 위로 해 주기 위해서는 '그' 슬픔을 겪고 있는 '그'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나 또한 그 책을 읽고 더 슬픔을 내 멋대로 위로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조앤 디디온의 '상실'도 비슷한 결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는 독자들에게 좀 더 '-해야한다'의 느낌이 강했다면 조앤 디디온의 '상실'에서는 그녀의 '경험'만 존재할 뿐
'조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겪은 그녀의 '경험' 그리고 '기억'들은 고스란히 그녀의 단어들로 책에 옮겨져 있고 이는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센 이야기였다.
그녀는 직접 누군가의 상실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상실 하고 난 후의 경험이며 적나라하다고도 느껴질 만큼(그러나 그녀의 문체가 너무 섬세해 적나라하다는 표현은 어울리는 것 같지 않지만 그녀의 솔직함을 표현하기에는 '적나라하다'라는 표현이 제일 어울린다는 나의 생각) 솔직한 그 때 그녀의
생각들 그리고 상실을 소화하는 기간동안 그녀의 무의식 내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생각들을 풀어낸
그녀의 글은 에세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 같았다.
직접 겪은 사람은 '그러그러하니 -해야한다' 라고 말할 '여력' 이 없다. 내가 느낀 슬픔은 이러했으니 마음대로 나의 슬픔을 해석하지 마- 라는 생각은 사치인 것이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닥친 상실과 비애를 겪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글들에선 마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이 슬픔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몸부림치고 있는
그녀가 보이는 듯 해 마음이 미어진다. 물기 하나 없는 그녀의 단어들, 사실만 나열하는 그녀의 글들에서도 툭 건드리면 눈물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누군가가 아직도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울지 않는 것만
같아 독자들의 마음이 더 안쓰럽다.
그녀는 슬프지 않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슬프지 '않'다.
아직 그녀에게 '그'는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직업이 '작가'였던 덕에 잔인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그녀의 '상실'을 이리도 날 것으로 간접 경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슬픔'은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설령 공부를 한다고 할 지 언정 역시 그 어떤 말로도 그 '슬픔' 에 무언가를 덧대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에세이를 읽으며 계속 '시'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글에선 마치 시의 '수미상관' 처럼 첫 연의 시작에서 끝 연으로 다다랐을 때 한 시가 완성되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한 번 읽고 그녀의 글의 깊이를 이해하는 건 아직 무리라고 느껴진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찬찬히 그녀의 시를 읽어야겠다고 여러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