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 위에서 데워진 도시락, 그리고 따뜻했던 그 시절
국민학교 시절, 겨울이 오면 우리 교실은 난로 덕분에 늘 아늑했다.
난로는 안전을 위해 철재로 칸막이를 둘러져 있었다.
장난기가 많고, 조심성이 없는 우리를 위한 배려였었다.
아침이면 선생님이 난로에 불을 지피셨다.
얼기설기 장작을 세워놓고, 그 밑에 우리가 주워온 나뭇잎을 넣어 불을 지피셨다.
어떤 날은 불을 피우는데 어려움이 있는날도 있고,
한번에 훅하고 불이 붙어 금새 교실안은 훈훈해졌다.
한번에 불이 붙는 날은 우린 “와아~~” 하고 함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뒤이어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주워온 나뭇잎이 불을 붙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많이 주워와야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수 있어요” 라고 덧붙이셨다.
우린 “네 선생님” 하며 즐겁게 하루를 시작한다.
난로의 온도가 높아짐에 따라 교실도 훈훈하게 달아오른다.
난로는 난방만을 책임지는것이 아니라,
차가운 도시락의 온기를 살려내는 도구이기도 했다.
난로 위에 커다란 주전자가 앉아 있고, 노란 주전자 밑은 거름으로 검은색의 조화로 왔다.
그 옆에 절제칸에 도시락을 가져다 놓는다.
대부분 도시락은 노란 양은 도시락, 많이 사용한 사람은 흰색 도시락 일 수도 있었다.
양은 도시락은 뚜껑과 밑부분이 잘 맞지 않아 틈이 나 있다.
1교시가 끝나면 우린 잽싸게 도시락을 난로가에 철제 깐막이에 도시락을 가져다 놓는다.
행동이 빠르지 않으면 도시락은 맨 위에 올려지면 따뜻한 도시락을 먹을수 없다.
따뜻한 도시락을 먹기 위해 행동이 민첩해야 한다.
우리 엄마는 매일 새벽이면 자식들 도시락을 7개를 싸셧다.
콩자반, 멸치볶음이었다. 그 옆에 김치도 살포시 자리 매김을 했다.
어쩌다 특별한 날에 달걀프라이가 도시락 중앙을 차지 했다.
그시절 달걀프라이는 귀한 보물같은 존재로 달걀 하나로 하루의 행복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도시락을 펼쳤을때 달걀후라이의 당당함은 결코 내 마음까지 당당하진 못했다.
의젓하게 앉아 있는 달걀은 친구들의 먹잇감일때가 많았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잠시 입으로 먹는 행복감은 느끼지는 못했다.
재빠른 친구들은 내 도시락의 달걀을 쨉싸게 낚아 채어가 입속으로 함몰 시켜버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툴수도 없다.
그져 “어머나, 내 달걀프라이” 하고 놀란 뿐이다.
집에와서 엄마에게 달걀을 못먹고 빼꼇다고 하면,
“넌 노른자가 터져 나온 밥이라도 먹었지” 라며 나를 달래셨다.
그후 엄마는 달걀 푸라이의 위치를 바꾸셨다.
당당한 프라이는 밥 밑으로 퇴출 되고 밥으로 푸라이를 감춰주셨다.
그러니 뺏기는 일은 없어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작은 승리감과 엄마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져 밥맛은 더욱 좋았었다.
물론 도시락을 쌀 때 김치도 빠지지 않는다.
도시락을 보자기로 쌓았지만 흐르는 국물을 막을수는 없었다.
김칫국물이 흘러 나와 책가방속에 들어 있는 책과 공책에 뻘건 김칫국물이이
붉은 테두리가 생겼고 친구들이 책과 공책이 거의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김치국물이 묻은 책과 공책을 보며, 우린 깔깔대고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따뜻한 추억이다.
점심 시간은 학교 생활의 하일라이트다.
걸상을 돌려 앉아 친구들과 마주 앉아, 따뜻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함께 먹는다.
도시락 가장 자리에 있는 밥을 1/3정도 먹어야만 반찬을 넣었을때 잘 비벼진다.
밥속에 숨겨진 달걀프라이와 멸치, 콩자반, 김치를 한데 섞어 도시락 뚜껑을 닫고 마구 흔들어 댄다.
그땐 써니텐 광고가 유행이어서 “흔들어주세요” 라는 말이 유행어였다.
흔들때는 일어나 춤까지 춰가며 도시락을 흔들어댔다.
막 흔들면 밥은 반찬들과 함께 합쳐졌었고,
때론 국물이 흘러 다른 친구들 머리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린 깔깔 댔다.
도시락 하나에 담긴 엄마의 정성은 춥지 않게 , 배고프지 않게 무엇보다 따뜻하게 만들어 주셨다.
난로가 있던 교실, 난로위에 데워진 도시락, 책가방속 김치국물 자국.
그 작은 세상안에는 가족의 사랑과 친구들의 우정이 있다.
어린시절 순수한 행복이 담겨져 있다.
난로가의 추억의 도시락은 점심만이 아니라 나를 키운 한 그릇의 사랑과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