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미국 지사장 이야기 ②]

공간의 언어와 온도, 말이 머무는 자리

by 글로벌리

회사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했다가

아무 반응을 받지 못한 날이 있었다.


누가 반박한 것도 아니었고,

누가 틀렸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자리 돌아와 한동안 생각했다.


회의때 내가 한 말이

너무 당연했는지,

아니면 너무 가벼웠는지

확신이 없었다.


다만 분명했던 건,

아무도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회사라는 공간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말을 했는지’보다

‘말이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좋은 의견이라도

맥락이 없으면 사라지고,

뻔한 말이라도

타이밍이 맞으면 남는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회의에서 말수를 줄였다.


말을 아낀 이유는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기 전에 먼저 파악할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누가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이미 어떤 결론이 암묵적으로 공유됐는지.


그걸 모른 채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서투르게 던진 말들

대부분 공중에서 사라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경험이

내 일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를 먼저 고민하지 않게 됐다.


대신

이 말이 지금 필요한지,

대화의 흐름과 맥락에 어울리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이건

회의의 기술이기보다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웠고,

말하자면 지식보다는 센스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수록

회의실에서 바로 말하지 않았다.


회의의 맥락을 파악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속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대화의 결에 맞추어 말을 꺼내거나


또는 회의가 끝난 뒤

조용히 사람들에게 다가가

질문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셨어요?”


그렇게 던진 말은

신기하게도

회의실에서 또는 그 밖에서

더 오래, 확실하게 남았다.


혹시 지금

회사나 타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말이 반응을 얻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또는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면,


그건

당신의 말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공간의 언어와 온도를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마치 꽁꽁 얼은 유리잔을

섣불리 뜨거운 열정만으로 움켜잡으면

오히려 손가락이 아프게 달라붙듯이,


때로는 그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공간이

내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녹기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공간의 온도를 이해하는 것.


사람들간의 소통도

어쩌면 그들과 나 사이 놓여진 공간의 온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말이 남도록 하는것.


공간을 파고들기보다

공간의 언어와 온도를 이해하는 것.


그 둘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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