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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Apr 13. 2023

낙타 등의 혹을 제거한 역사 - 3

낙타 등의 혹을 제거한 역사적 사건들

낙타 등의 혹을 제거한 역사적 사건들



흑사병 창궐 속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

중세 유럽에서는 1347년~1351년 3년간 공포의 흑사병이 창궐하여 2천만명의 목숨을 잃었다. 공포 속에 하루하루가 불안한 사람들은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속에서 지옥을 살았다. 널리 유포된 끔찍한 유언비어 중 하나는 누군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었다. 평소 증오의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테러가 행해졌다. 유대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규모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되거나 불에 타 죽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당하게 된 것은 기독교도들이 평소에 미움을 받은 이교도였다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대부업과 상업으로 부유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학살이 점점 심해지자 교황까지 나섰다. 클레멘스 6세는 학살을 금지령과 함께 유대인들을 보호하려 나섰지만 평소에 유대인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기독교도 만행을 중지시키지는 못했다.


근현대사에서도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역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사회 불안의 원인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렸다. 조선인들이 일본인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경찰과 민간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발생과 전파를 이유로 수많은 서구 국가에서 동양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테러가 자행되었다. 이는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과 행동 반경 제한특정집단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십자군전쟁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포스터

영국의 유대인 추방령

1096년 1차 십자군원정과 더불어 영국에서는 유태인 박해와 살해가 잇달았다. 반유대정서가 고조된 탓이다. 살기위해 많은 유태인들이 지금의 벨기에 땅 플랑드르(영어식 발음 플랜더스) 브뤼헤로 탈출했다.

이후 3차 십자군 원정 때인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일시에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업에 종사하던 1만6000명 모두를 한꺼번에 내쫓았다. 역사상 최초의 유태인 추방이다. 이는 반유대 정서가 팽배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유대인에게 진 빚을 무효화하그들의 재산마저 몰수하기 위해서였다.


1306년에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까지 브뤼헤에 합세했다. 브뤼헤는 프랑스산 포도주, 아마포와 양모 등 프랑스 상품의 수출입 중심항구가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브뤼헤는 무역이 번창했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유태인을 추방하여 플랑드르가 상업적으로 번성하게 한 셈이었다.


1492년 스페인과 1497년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 역시 종교의 자유와 동족들이 있는 브뤼헤였다.


혹을 제거한 역사 낙낙타 등의 혹을 제거한 역사 - 1낙타 등의 혹을 제거한 역사 - 1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유대인 추방령

스페인 이사벨 여왕에게는 1492년에 레콩퀴스타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알람브라-♬황성옛터' 편 참조) 이외에도 한 가지 사건이 더 얽혀 있었다. 바로 ‘유대인 추방령’이다. 레콩퀴스타로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여왕에게는 기독교 왕국 스페인에 유태인들이 그대로 살게 둔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이었을 때에는 그들은 유태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 이사벨은 이교도들에게 '개종이나 추방이냐'를 두고 양단간 선택을 명했다. 개종을 거부한 수십만 유태인이 스페인을 떠났다. 유태인의 추방은 돈의 추방이었고 지식의 유출이었고 노동력의 상실이었다. 스페인은 통일과 동시에 이념과 정신의 문을 닫아걸었다. '열린 스페인'이 날이 갈수록 '닫힌 스페인'으로 경도되어 갔다. 카톨릭의 순혈주의 강조로 다양성을 상실했고 유대인과 아랍인 추방령으로 경제력과 노동력을 상실했다. 이는 유럽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종을 거부한 유태인들은 대거 이웃나라 포르투갈로 몰려갔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17만 명 유대인  절반이 넘는 10만 명이 포르투갈로 들어갔다. 시에는 엄청난 숫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포르투갈 왕이 된 마누엘 1세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스페인 연합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심으로 스페인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유대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1496년 12월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그들은 또 다른 정착지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브뤼헤와 안트워프였다.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유대인 박해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하다

유대인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금융 가문을 일궈냈다.  러일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두 일본을 지원한 이유는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키기 위해서였다. 유대인 야곱 쉬프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에이전트였다. 그는 러시아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데 분노하고 있었다. 러시아 차르는 혁명지도자였던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와 혁명 세력을 약화시키기위해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했다. 유대인들이 발트해와 흑해 사이에서만 살도록 거주지를 제한했다. 차르의 유대인 억압 조치는 국민의 반(反)유대 정서를 자극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내부에서도 은밀한 전쟁이 진행되었다. 야곱 쉬프를 위시하여 유대 금융인들은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지원했다. 한편 1905년 1월 일본이 뤼순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군 2만2000명을 포로로 잡았을 때, 야곱 쉬프는 포로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의 정당성을 교육시켜 이들이 귀국하면 러시아 혁명 전선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과 미국을 움직여 일본의 국채를 사들이게 함으로써 일본의 전쟁자금 마련의 길을 터주었고 일본에 최신 전함을 비롯한 무기를 판매하게 했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아돌프 히틀러는 '우수한 아리안 족'에 의한 군국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쓰레기같은 유대인'을 지구상에서 쓸어 없애겠다고 공언하며 '인종청소'를 시작하였다. 이른바 홀로코스트(Holocaust)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집단을 결속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같았다.


"공동의 적을 만들라."


세계 정복을 꿈꾸며 게르만족의 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나치는 그들이 지정해둔 하나의 표적에 모든 독일인들이 손가락질 하도록 억지이론을 만들어내고 선전선동을 했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보면서 그들이 한 민족이며 하나의 목표를 가진 우수한 아리안족이라는 미약에 취했다. 1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엄청난 전쟁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바닥을 친 민족적 자존감에 혜성처럼 나타난 히틀러와 나치는 한 줄기 빛이었고, 히틀러는 그 빛줄기에 황홀해하는 국민들을 위한 광란의 학살파티를 준비했다.

나치 점령지역의 유대인들은 특별관리구역인 게토(ghetto)에 수용되어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다. 이를 본 수많은 미수용 유대인들은 극으로 치달아가는 광기를 예견하고서 나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또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물리학자 아인쉬타인도 그 무리 속에 있었고,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도 있었다. 그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보다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요청을 하였다. 그래서 세계최초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 대에 미국으로 귀화한 유대인 오펜하이머 박사가 합류하면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 박해와 직접 연관은 없었지만 프랑스 루이14세 역시 낙타의 혹을 자른 왕이었다.

프랑스 왕 앙리4세는 1598년 '낭트칙령'을 내려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신교도들이 파리를 제외한 지역에서 공공예배를 볼 수 있게 했으며 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허용했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완전히 철폐함으로써 프랑스 신교도의 모든 종교적 자유와 시민권을 박탈해버렸다. 프랑스는 가장 근면한 상업 계층인 위그노를 상당수 잃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이가 독일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다. 그는 '포츠담칙령'으로 위그노들에게 시민권과 면세혜택, 주택과 농토, 일자리와 정착자금을 약속하며 프로이센으로 올 것을 요청했다.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위그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땅과 집을 처분하고 평생 일군 것들을 가지고 넘어왔다. 선진 기술과 지식, 자본이 저절로 따라 들어온 것은 물론이다. 지지부진하던 프로이센의 각종 산업과 농업이 위그노의 주도하에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그만큼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 프랑스였다.



무릇 국가의 지도자란 존재는 개인적 혹은 일부집단의 감정을 국가 운영에 개입시켜서는 안된다. 우선해야하는 것은 국가 발전과 안위의 문제이다.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왕과 국가지도자들이 사사로운 감정과 그릇된 민족 감정으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심지어는 나라가 존망의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때가 있었다.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불모의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역경일 수 있다. 사막을 건너려면 건강한 낙타가 필요하고 낙타의 힘의 근원은 낙타 등에 난 혹임을 알고 함부로 제거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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