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르는강물처럼 Aug 12. 2023

마취정치


70대의 나이가 된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히 건강과 질병에 관한 대화를 많이 하게 됩니다. 오래 살고자 하는 소망도 건강한 장수이어야 진정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화와 더불어 찾아오는 질병은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며 그에 따른 육신의 고통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으나 병으로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합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마취시술 없이 수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 수술을 받으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호흡이 멎는 순간까지 그냥 앓다가 죽기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명한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은 온 인류를 고통의 나락에서 구해낸 천사 같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마취 없이 수술을 받다가 고통을 못 이겨 쇼크로 사망하는 환자도 많았을 것이고, 마취받고 수술받는 지금도 그렇지만 맨 정신으로 수술받던 시절에는 수술하는 의사의 정확하고도 빠른 손이야말로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금손 중 금손이었을 것입니다. 수술하는 의사입장에서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환자의  미세한 환부 조직을 다루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환자를 지켜보며 수술해야 하는 의사가 당하는 마음의 고통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마취술이야말로 최고의 발명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동의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마취 상태로 수술받은 사람은 수술 후 수술 부위의 상처 회복과 더불어 마취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으로 회복이 다소 늦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피로감, 메스꺼움과 구토, 현기증, 방향감각 상실, 수면곤란, 집중장애 등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수술 전의 공포와 수술 중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보다는 수술 후의 회복 지연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경제(經濟)는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이라는 경세제민(經世濟民)과 경국제민(經國濟民)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정치계'와 '경제계'는 서로 협업하여 국가경제발전을 이루어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하고 절대 필요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정치경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정경유착'이란 말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지휘자의 지휘 아래 감동적인 연주를 하는 오케스트라.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사랑으로 가득한 가정의 부모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경유착'은 기업가는 정치인에게 불법적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정치인은 반대급부로 기업가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인과 기업가 사이의 부도덕한 밀착 관계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정치계를 소재로 삼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극 중에는 불법 정치 자금과 뇌물을 제공하는 기업인들과 부정적 거래를 하는 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로 여기서 정치와 경제의 원래 목적이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권력유지와 돈을 버는 일이 국가발전을 위한 협업보다 우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배우가 드라마에 나오지 않듯이,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의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정치 드라마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는 정경유착 내용이 약방 감초처럼 들어간다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해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데 엄청난 돈을 그냥 제공할 기업은 없습니다. 제공받은 돈만큼 혜택을 주어야 하는 정치인은 채무자가 됩니다. 기업가에게 뒷다리를 잡히고 있으니 소신대로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그것을 이용하여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마취된 상태로 정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에 마취되어 후원자가 이익을 얻도록 개입하고 특혜를 베푸는 행위는 마취된 환자가 의식 없이 누워있는 것처럼 돈에 영혼을 팔아버리고 채권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38사기동대 제16화의 한 장면 - 무릎 꿇고 애원하는 서원시장 천갑수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38사기동대>는 '권리는 다 누리면서 의무는 쌩까는' 고액세금체납자들에게서 사기를 쳐서 세금을 받아내는 서원시 세금징수국 공무원 백성일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극 중에는 서원시장 천갑수가 자신의 시장 선거 자금을 댄 최철우에게 찾아가 이제 훌륭한 시장으로 거듭나고 싶으니 자신을 놓아달라고 애원하며 무릎을 꿇는 장면이 있습니다. 최철우의 마취에서 깨어나 자신의 영혼을 되찾아 진정한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를 원하지만 최철우는 도사견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희곡 <Dr.Faust>에는 세속적 욕망을 갈망하는 파우스트 박사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 내용이 있습니다. 권력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허수아비 시장이 된 천갑수에게 최철우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습니다. 최철우의 요구는 '정당'했고 천갑수의 비리는 '필연'이었습니다. 


최철우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던 천갑수는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딱 한 번만 참고 그 사람들 도움받으면, 그렇게 시장이 되면, 
내가 꿈꿨던 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말이야...

세상은 그렇더라.
편의는 특권이 되고, 
호의는 뇌물이 되고, 
친분은 범죄가 돼.


권력이 제공한 '편의'는 정의롭지 못한 '특권'이었습니다. 불법을 외면하고 받았던 돈은 '호의'가 아니라 '뇌물'이었습니다. '친분'때문에 불의에 눈감은 결과는 수많은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정경유착의 대차대조표만큼 페이지 수가 많은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정말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현실은 이보다 더한 냄새가 나는 현실일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순수하게 보되, 순수하게 살진 마라. 그래야 살아남아."라고 딸에게 말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걸린 올가미의 철사줄이 얼마나 질긴지, 자신의 몸에 주입된 마취약이 얼마나 강한지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어느 정치인의 연설문 내용입니다. 이 말에 온 국민이 환호를 했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수 있다고 하고, 윗물들은 아랫물도 혼탁하니 윗물이 조금 구릴지라도 표시가 덜나고 아랫물도 그냥 욕만 하고 넘어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대한민국 현실 정치다큐멘터리가 될 날을 고대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여자가 무섭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