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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Aug 21. 2023

냄새, 나의 정체성



어떤 사람의 고매한 인품을 두고 말할 때 '그분의 향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분의 모습'이나 '그분의 말씀'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분의 향기라는 표현이 더 포괄적이고 더 추상적이고 더 멋있습니다. '은은하다'라는 형용사는 '모습'이나 '말씀'보다는 '향기'와 어울리는 말입니다. '말씀은 향기'라는 은유적인 수사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말씀의 깊은 뜻이 향기가 되어  온누리에 은은하게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은(隱隱)하다에서 한자 '隱'은 숨기다 가리다의 뜻을 갖습니다. 향기를 포함한 냄새는 시각적 모습과 청각적 소리 뒤에 은자(隱者)로 숨어서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인지기능의 제갈공명과 같습니다. 삼고초려의 요청을 받고 나서야 출사 하듯이 숨어서 은거하는 감각 같습니다.  


냄새와 향기는 퍼진다고 합니다. 모습은 빛의 속도 약 30만 km/s로 전달되고, 소리는 초당 340m/s의 속도로 전달되지만 냄새는 '隱隱/h'의 속도로 전달됩니다. 서두르지 않으니 군자 같습니다.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어느 상업 광고 속의 카피입니다.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말입니다. 내 남자와 같은 종류의 로션을 사용하는 남자. 그 남자를 연인으로 가진 여자. 그 여자가 내 곁을 스치는 순간. 여자는 '그 향기'를 맡던 연인과의 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토록 민감한 여자의 후각을 만족시킬 향기를 가진 남자가 되어보세요. 뭐~ 이런 말인가요. 아주 수가 높은 상업적 수완입니다. 그런데 왜 '낯선 남자에게서 내 여자의 향기가 난다'가 아니었을까요. 여자는 내 남자의 냄새를 가진 다른 여자를 찾아낼 수 있지만 남자는 내 여자의 냄새를 가진 남자를 알아내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여성 특유의 청결함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아마 후각적 민감성에서 인 듯합니다. 어지럽혀진 공간은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 청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냄새의 원인을 제거하려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를 맡아내는 게 여자들이니 '꼬리한' 냄새도 잘 맡아낼 것입니다. 남자라면 잘 견뎌낼 냄새에도 치를 떨 것입니다. 물론 남자도 남자 나름이요 여자도 여자 나름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청결하다' 보다는 여자는 '청결지향적이다'라고 말해두겠습니다. 


내 남자의 향기 운운하는 상업광고 카피 말고 실제로 여자가 후각에 민감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있는 걸까요.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모넬 화학 감각센터는 <네이처 신경과학지>에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후각이 더 발달했다는 내용입니다.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이 사춘기에 도달했을 때 남녀 간 서로 다른 성징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하므로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그 원인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성만을 두고 볼 때에 에스트로겐 분비가 많은 여성들의 후각이 에스트로겐이 활성화되기 전인 사춘기 이전과 에스트로겐의 분비가 줄어든 갱년기 여성들에 비해 더 예민하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의 후각이 남성보다 발달한 요인이 에스트로겐이라는 연구결과가 설득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후각적 민감성은 임신가능 여성 즉 월경이나 임신 중인 여성의 에스트로겐 변동과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출산을 앞두고 자신이 낳은 어린 생명을 인식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모성본능이 발동하면서 후각을 이용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서 동물적인 본능이 발현되는 순간이라고 봅니다.




동물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숲에서 야생동물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맹수들과 맞닥뜨리지 않도록 공원에서 특별한 관리를 하겠지만 온순한 동물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특히 사슴은 온순하고 체형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동물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아기사슴을 만나면 그 모습이 외롭고 가련해 보여서 관광객들은 아기사슴을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사슴과 신체적인 접촉을 하게 되면 어미사슴의 동물적인 감각 특히 후각에 적색경보를 울리게 합니다. 어미 사슴은 자신의 새끼를 인식하는 방법 중에 후각을 이용하는 방법에 크게 의존한다고 합니다. 사람과 접촉을 하게 되면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나듯이' 아기 사슴에게서 사람의 낯선 냄새가 나게 됩니다. 어미에게 새끼로 인정을 받게 해 주던 후각 가족관계증명서가 사라지고 낯선 동물이 되어서 어미에게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람 냄새가 밴 아기 사슴을 어떤 암사슴도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아기 사슴은 굶어 죽는 형벌에 처해진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귀엽다고 해서 함부로 아기사슴을 만지게 되면 선의의 행위로 한 것이지만 어린 생명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월트디즈니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 아기사슴 '밤비'를 인용해서 이런 현상을 밤비신드롬(Bambi Syndrome)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아기오리'에서는 알껍질을 깨고 귀여운 오리들이 세상으로 나오다가 마지막 알에서는 귀여운 아기 오리와 다른 모습을 한 못생기고 큰 오리가 태어납니다. 이상한 모습 때문에  어미에게서 버림받고 무리에서 쫓겨납니다. 쫓겨난 이유가 밤비신드롬의 사슴처럼 오리가 후각이 발달하지 못해서 시각에만 의존할 정도여서인지 아니면 나중에 자라서 백조로 밝혀지는  '못생긴 오리'의 타고난 백조 냄새 때문에 쫓겨난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안데르센은 어린아이들의 상상력과 정서 발달을 위해 스토리를 꾸민 것일 뿐, 과학적인 근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데르센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동화창작 이후 못생긴 오리를 통해 얻은 반전의 기쁨과 통쾌함을 즐겼을 그리고 지금도 즐기고 있는 수백억 '미운 아기사람'들의 뭇매를 맞을 각오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농경사회에 이르기까지 원시시대의 남자들은 가족이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악과 초원을 뛰어다닌 사냥꾼이자 채집가였습니다. 좋은 시력이 곧 좋은 사냥술이었습니다. 수만 년이 지난 이제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동물 같은 시력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안경도 있고 망원경도 있고 위치추적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시력이 좋다는 연구결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산모들이 자신의 아기를 구별하기 위해 그리고 보호하기 위해 후각을 사용할 일은 별로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발목에 인식표를 차게 되고 건강을 체크하고 치료하는 의료기구들에 의존하지 산모의 후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남성들의 시력은 여성의 시력보다 더 낫지 않은데 왜 아직까지도 여성의 후각은 남성의 후각보다 더 뛰어나다는 건지 왜 그런지 특별한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 집니다. 남자로서의 불만이 아니라 단순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의 냄새와 고소름하게 익어가는 고등어구이에 익숙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발급받은 후각신분증명서를 아직도 가지고 계시나요. 분실한 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발급받을 생각조차 없으신 건 아닌지요. 혹시 서양식 ID카드를 받아서 자랑스러워하고 있으시지는 않나요. 서러움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백조로 태어나는 사람이 될지언정 냄새를 이유로 어머니에게 '미운아기오리'가 되지는 마세요. 


우리 민족에게도 후각신분증명서가 있습니다. 서양 흡혈마귀 드라큘라도 쫓아내던 마늘 냄새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입니다. 마늘과 쑥을 먹고 백일을 지내면 여자가 되는 곰의 후손이 우리 민족이라는 건국설화를 잊으신 건 아닌지요. 호랑이도 견디지 못한 백일을 미련곰탱이처럼 견뎌낸 곰을 토템으로 하는 우리 민족입니다. 김치녀, 된장녀 등으로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 바랍니다. 서양인들이 육식하는 식습관으로 몸에서 풍기는 특유의 암모니아성 '노랑내' 때문에 육식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후각신분증명서로 삼듯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되도록 우리 조상님들께 잘 살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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