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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선 Sep 24. 2023

마음을 패는 그 소리

오늘도 아버지는 장작을 패신다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는데,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렸다. 

'맨날 힘들다 하시면서 또~'하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 아버지의 땔감 나무 사랑이 지나치셔서 종종 우리 자식들과 작은 전쟁을 치른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까지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곳은 경북 상주에서도 한참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면 소재지도 아닌 '신촌리 솔정자'는 열다섯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동네이다. 

그 당시 시골인데도 우리 마을은 3대가 모여 사는 집이 없었고 대가족이라 할만한 집도 없었다.

우리 집만 할머니에 그 당시 결혼 안 한 막내 고모에 부모님과 우리 육 남매.

참 다복하고 복잡복잡 다사다난한 재미가 있는 대가족이었다. 



일 년에 열 번의 제사와 두 번의 명절, 그리고 시제도 지내야 했고, 벌초도 해야 했으니 우리 집 식구만 해도 대가족인데 늘 시끌벅적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집성촌은 아니었지만, 일가들이 가까이에 많이 사셨다. 우리 집에 어른(할머니)이 계시기도 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운 탓에 일가친척분들이 늘 우리집에 들러서 막걸리 한 잔 드시고 가시곤 했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일가들도 집안 어르신인 할머니께 인사 드린다고 꼭 우리 집에 먼저 들렀다가 당신들 집으로 가시곤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이 마냥 좋은 동생과 나는 막걸리 심부름도 다녀오고, 어른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해서 용돈을 받곤 했다.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하셨을 엄마의 어려움은 모른 채 마냥 신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 시절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여느 시골 아버지들 같지 않았다.

국민학교 밖에 안 나온 시골 분이지만 책을 멀리하지 않으셨고, 이장이며 조합장이며 바깥일을 하시며 양복을 입고 나가시는 날이 꽤 많았다.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사 가지고 오신 날은 내 어깨도 으쓱해졌다. 80년대 초반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쉽지 않았던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갈 때면 얼마나 신나던지. 

농협 마당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사무실로 들어가면 항상  따뜻한 난로가 피워져 있었다. 많은 아저씨와 언니들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어린 마음에 '우리 아버지가 여기 대빵이야.' 하는 우쭐함이 있었던 것도 같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아버지는 내게 동전의 양면 같은 감정을 느끼게 했다. 사춘기라 해서 별달리 사고를 치며 다니지 않았던 나였지만 동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여름날 둑방길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늦게 들어오곤 했다. 며칠 그런 날이 계속되면 아버지는 그저 조용히 "좀 일찍 다녀라." 그 한마디를 하셨다. 큰소리로 꾸짖거나 하지 않는 아버지의 세련됨이 참 좋았다. 



이맘때 아버지 당신도 나 못지않게 바깥일로 바쁘셨다. 귀가가 늦으시는 날이 많아 부부싸움이 잦은 시기였다. 가끔은 제삿날인데 귀가가 늦어지셔서 온 가족이 제사음식을 준비해 놓고는 귀를 바깥에 둔 적도 있었다. 일가친척들도 제사 모신다고 와 있는데.

이 시절 나의 일기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아버지의 바깥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답답함도 함께 적혀 있었다. 

좀 더 자라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는 일 때문에 늦은 날보다 친구분들과 취미생활(화투)을 하시느라 늦은 날이 더 많았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는 시골 분답지 않게 무조건 공부를 해야 한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길을 제시해 주는 멋진 분이었다.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내가 대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대학을 합격했을 때 자취방을 구해주시고, 함께 학교를 둘러봐주시기도 하셨다. 



시골 살림이 다 그렇지 않은가.

땅이 좀 많다고 해도 농사지어야 하니 땅은 땅일 뿐 재산이 아니다. 당장 현금화할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는 늘 쪼들리는 편이었다. 

그런 형편에도 대학에 가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여전히 당신은 멋진 나의 아버지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사실 나보다는 다른 형제들과의 갈등을 지켜봤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육 남매들이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못난 자식을 끌어안기보다는 남들 보기 창피해 하시는 것 같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아들과 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셨다. 심지어는 조카들조차 손자, 손녀에 대한 차별이 심하셨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잡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나는 그저 말하지 않았다. 사실 못난 자식이었으나 말하지 않음으로 못난 자식이 아니라 그저 무심한 자식이 되었다. 



이제 아버지도 늙으셨다. 여기저기 아프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음의 약함을 숨기지 않으신다. 때로는 어깃장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여든여섯의 나이에 단순한 어깃장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약해진 아버지를 지켜보는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다. 원망도 있고, 미움도 있고, 사랑도 있고, 연민도 있다. 



엄마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고 그런데도 여전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답답함을 호소하곤 하실 때는 참으로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엄마의 상황을 인정하고 환자로 대하면 서로가 좀 더 편안해질 텐데.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보다 연민이 더 커졌다. 평생 누군가를 돌보기보다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사셨을 당신.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라 해도 누군가를 돌보는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당신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 답답하기도 하다. 조금만 앞날을 생각해보시면 좋을텐데.



나의 우상이었던 아버지가 늙어가신다.

형제자매 중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나는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해 보고자 애쓰는 시간이다.



저녁을 드신 후 아버지는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장작을 패신다.

나는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다.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냥 있지 못하겠다는 말씀이 내 귓가를 맴돌고 있어서…….



늦도록 장작 패는 소리가 나의 마음을 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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