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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선 Jan 14. 2024

아버지의 전화

얼마 전 토요일.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이번 주에 오냐는 전화셨다. 

내려간다고 말씀드렸더니,

전화를 끊으시기 전에 차에 기름넣지 말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저 무심히.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어떠한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정말 무심한 관계이다.

별 일이 없으면 연락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참 좋아하고,

지인들과 자주 통화를 하는데,

그리고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드문드문이라도 연락하며 지내는 편인데

왜 아버지와는 그것이 잘 되지 않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엄마에게조차 그리 살갑게 전화를 하지 않았으니 아버지는 더 어색하지 않았나 싶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겨울 방학에 천자문 한 권을 사 오셔서 이것을 외우면 오천원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국민학생 버스비가 4~50원 정도였으니 오천원은 엄청 큰 돈이었다. 

50원이면 하드(아이스크림의 다른 이름)며, 쫀디기, 아폴로 등 

못 사 먹을 간식이 없었다. 




내가 천자문을 어디까지 외웠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저녁이면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가서

두근두근 하며 그날 외운 천자문을 아버지 앞에서 읊곤 했다. 

그 설렘이,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가면서 마루를 걸어가던 그 때의 겨울 느낌, 

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 앞에 서서 떠듬떠듬 외우던 떨리던 목소리,

잘 기억이 안 나서 책을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했었다. 




방학이 끝난 무렵.

난 아마 다 외우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오천원은 받았었다. 

아버지도 알지 않으셨을까?

내가 다 외우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그저 한자를 좀 가르쳐보고 싶었던 것이고,

겨울 방학을 뭔가 하면서 알차게 보내게 하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중고등학생 시절의 아버지는 참으로 미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조합장 일을 하시면서

집안일보다는 바깥일에 더 열심이셨고,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바깥일보다는 당신의 놀이(화투나 친구들과의 시간)에 더 열심이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주머니는 늘 넉넉했던 것 같은데,

우리집 살림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그저 가끔 좀 넉넉하게 용돈을 받고 했다. 

술도 안 드시는 우리 아버지.

그러면서도 참 잘 노셨다.




어쩜 나는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술 한 잔도 못하지만 밤새워 노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대학을 입학할 때는 엄마 대신 아버지가 자취방을 구하러 가 주셨다. 

우리 아버지.

혹시 학교 바로 앞에 자취방을 구하면

친구들의 아지트가 될 것을 걱정하셨는지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방을 구해주셨다.

버스를 타고 다녀야했지만, 

아버지 생각에는 딸자식 혼자 멀리 보내면서 걱정이셨던 모양이다. 

주인 아주머니께 몇번이나 부탁들 하시곤 가셨다. 

그래도 뭐.

나 그 나이 젊은 애들이 할 것은 다 하고 다녔는데...




무심한 듯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자식 걱정 많으셨던 우리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도 늙으셨다. 

슬프게도.

작년 초까지만 해도 핸드폰 사용을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하시더니,

요즘은 문자 보내는 것도 카톡 보내는 것도 점점 힘들어하신다. 




넉넉하지 못한 딸자식이 걱정이셨던 모양이다. 

얼마전 남편의 폐렴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해서 병원비가 많이 나왔다하니

(나는 그런 이야기 하지 않는데, 큰언니가 한 모양이다.)

돈을 보태주지 못해서 마음이 불편하셨나보다. 

그래서 차에 기름이라도 한번 채워주고 싶으셨나보다.



 

전화를 끊이시기 전에 무심한 듯.

차에 기름 넣지 말고 오라시는 말씀이 

이 겨울. 

나의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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