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 재도약과 혁신
클럽하우스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앞선 아홉 홀동안의 샷들을 동반자들과 이야기하면서, 후반 아홉 홀에서는 멋진 모습을 보이자고 '화이팅!'을 외치면서 후반전을 시작합니다. 경지 진행요원에게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도 주면서 후반전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도 하지요.
새로운 시작이 되는, 이번 홀에서는 기존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혁신을 보여주는 리더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럭셔리 브랜드'하면 어떤 브랜드들이 생각나시나요? 저는 일단 에르메스(Hermès), 루이 비통(Louis Vuitton), 샤넬(Chanel), 이렇게 3개 브랜드가 생각이 납니다. 비쌉니다. 여자들이 좋아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좋아합니다.
에르메스
독일 태생의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ès)'는 1837년 파리의 '뤼 바스 뒤 랑파르 56번지(rue bass-du-Rempart 56)'에 마구(馬具) 세공 상점을 열었습니다. 당시 마차는 귀족들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는데, 티에리는 말의 몸에 딱 맞으면서도 튼튼하고 우아한 안장과 고삐(Harness)를 제작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 잡고 현재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에르메스는 다른 명품 브랜드들이 거대 자본(LVMH 등)에 흡수될 때도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하며 독립성을 지켰습니다. 현재 6대손인 악셀 뒤마(Axel Dumas)가 경영을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원래 에르메스의 상자는 크림색이나 겨자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물자가 부족해지자, 당시 구하기 가장 쉬웠던 오렌지색종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뜻밖에도 반응이 좋아 오늘날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색깔이 되었습니다.
악셀 뒤마는 에르메스는 전통과 장인 정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읽고 과감하게 에르메스를 변화 시켰습니다. 단순히 가방을 잘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진화를 시키지요.
가장 보수적인 명품 브랜드 중 하나인 에르메스가 애플(Apple)과 협업 한 것은 업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워치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에 에르메스의 가죽 장인 정신을 입혔습니다.
그 결과,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해 젊은 세대들을 고객으로 유입시켰으며, 2025년 현재까지 10년 넘게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2015년~현재).
에르메스는 최고급 동물 가죽을 고집하는 브랜드로 유명하지만, 환경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새로운 소재를 연구해 왔습니다. 미국의 스타트업 마이코웍스(MycoWorks)와 협업하여 버섯의 균사체로 만든 비건 가죽 '실바니아(Sylvania)'를 개발했습니다. 동물 가죽의 질감과 내구성을 유지하면서도 친환경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에르메스의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2021년).
제품을 만들고 남은 가죽 조각이나 실크 자투리는 보통 폐기되지만, 에르메스는 이를 새로운 예술품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자투리 소재들을 모아 장인과 아티스트가 협업하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품(가방 장식, 인테리어 소품 등)을 만드는 '쁘띠 아쉬(petit h)' 라인을 런칭했습니다. 이것은 '버려지는 재료는 없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환경 보호와 창조적 디자인을 결합한 럭셔리 업사이클링의 선구적 사례입니다(2010년).
에르메스는 오프라인 매장의 경험을 중요시하면서도, 브랜드의 문턱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는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문턱을 낮추어도 비쌉니다.
2020년 '에르메스 뷰티(립스틱 등)' 라인을 런칭하며 온라인 판매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비교적 접근이 쉬운 화장품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디지털 고객들이 에르메스 생태계에 입문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가장 전통적인 회사가 공급망 관리와 수요 예측에 AI 기술을 도입하여 과잉 생산을 방지하고 장인들의 효율적인 작업 환경을 구축하는 등 내부 시스템도 현대화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혁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루이 비통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 쥐라 산맥의 목공소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가 들어오는데, 그녀가 루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갈등을 겪던 루이는 14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가출이라고 하지요). 돈이 없었던 그는 파리까지 약 400km의 거리를 2년 동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대단한 녀석입니다.
파리로의 이동 중에, 길거리에서 여러 기술을 배우며 고생 끝에 1837년 파리에 도착했고, 당시 유명한 가방·상자 제조 전문가였던 '무슈 마레샬'의 수습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귀족 여성들의 드레스는 매우 크고 화려했습니다. 여행 시 이 옷들을 구기지 않고 안전하게 박스에 담는 기술이 매우 중요했는데, 루이는 이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Eugénie de Montijo) 황후의 전담 가방 제작자로 발탁되었습니다. 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과 니즈를 완벽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이렇게 명성을 쌓아가던 루이는, 1854년, 파리 뢰브 데 카푸신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건 첫 매장을 열었습니다. 당시의 가방들은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윗부분이 둥근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이는 기차나 배 여행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가방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공간활용에 대하여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바닥이 평평한 사각형 모양의 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무거운 가죽 대신 가볍고 방수가 되는 '그레이 캔버스' 천을 씌워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식 여행 가방의 시초입니다.
혹시, 난파된 배에서 루이 비통 가방이 사람을 살리는 부표 역할을 했었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그만큼 밀폐가 잘 되도록 만들었다는 말이겠지요.
물론 성공에는 위기도 따릅니다. 루이 비통 가방이 대히트를 치자 디자인을 베낀 모조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예나 지금이나 짝퉁이 문제입니다). 루이 비통은 줄무늬 패턴(레이에), 체크무늬 패턴(다미에) 등을 개발하며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이후에, 창업주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1896년 아버지 이름의 이니셜인 L과 V, 그리고 꽃과 별 문양을 조합한 '모노그램 패턴'을 창안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풍 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오늘날 루이 비통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요.
루이 비통의 역사에서 수많은 경영인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계 1위 명품 제국' 루이 비통을 만든 가장 혁신적인 인물로는 단연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루이 비통을 만든 현대판 창업자로 불립니다. 그의 혁신은 '럭셔리의 산업화'에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 흩어져 있던 독립 명품 브랜드들을 모아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명품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보수적인 명품 하우스에 젊고 파격적인 디자이너(마크 제이콥스, 존 갈리아노 등)를 발탁하여 브랜드를 젊게 만드는 전략을 처음으로 대중화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전 세계적인 유통망을 구축해 매출을 극대화하는 상반된 전략을 성공시켰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 아주 유명하지요. 마크 제이콥스(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루이 비통의 이미지를 혁신합니다.
1997년 제이콥스의 취임 전까지 루이 비통은 가방만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그는 루이 비통의 의류 라인을 성공적으로 런칭하며 토털 패션 브랜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명품 로고 위에 그라피티를 그리거나(스테판 스프라우스), 팝아트를 입히는(무라카미 다카시) 등의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파격적이지요. 이는 오늘날 모든 명품 브랜드가 따라 하는 '콜라보레이션 마케팅'의 시작이자 공식이 되었습니다.
에르메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전통을 고수할 때, 루이 비통은 힙합과 스트릿 문화를 흡수하며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가장 힙한 명품'으로 브랜드 체질을 완전히 개선했습니다. 그래도, 에르메스가 더 비쌉니다.
샤넬은 어떨까요?
샤넬은, 1883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에 의해 수녀원 부속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수녀원의 엄격한 흑백 의복, 차가운 석조 건물의 문양 등은 훗날 샤넬의 '블랙 앤 화이트' 미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샤넬은 밤에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활비를 벌었는데, 이때 부른 노래 제목 때문에 '코코(Coco)'라는 애칭을 얻게 됩니다.
1910년, 파리 캉봉 거리 21번지에 자신의 첫 모자 가게를 열었습니다.
당시 귀족 여성들의 모자는 커다란 깃털과 꽃으로 장식되어 매우 무겁고 화려했습니다. 샤넬은 이를 거부하고 장식을 걷어낸 단순하고 세련된 모자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파리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샤넬의 가장 큰 혁신은, 여성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었습니다.
당시 남성용 속옷에나 쓰이던 값싼 소재인 '저지'를 활용해 여성용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신축성이 좋아 활동하기 편한 이 옷은 전쟁 중 일손이 필요했던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검은색은 슬픔의 색이라는 당시의 고루한 생각을 깨고, 1926년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드레스를 발표해 '현대적 우아함'의 기준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1921년, 당시 향수들은 단일한 꽃향기뿐이었으나, 샤넬은 화학 성분(알데하이드)을 배합한 '인공적인 향수'를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것이 전설적인 바로 그 '샤넬 No.5'입니다.
또한, 가방은 손에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군인들의 가방에서 영감을 얻어 어깨에 메는 체인을 단 '2.55 핸드백'을 출시했습니다. 여성이 가방으로부터 두 손의 자유를 얻게 된 순간이며, 남자들에게 커다란 숙제를 안겨준 것이기도 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창업자인 샤넬 이후 가장 혁신적인 샤넬의 리더는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무너져가던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고 영향력 있는 '럭셔리 브랜드'로 재건한 실질적인 경영 리더였습니다.
1971년 가브리엘 샤넬 사후, 샤넬은 할머니들이나 입는 브랜드라는 평을 들으며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1983년 취임한 그는 여러가지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샤넬의 '더블 C' 로고를 가방 잠금장치뿐만 아니라 단추, 안감, 귀걸이 등 모든 곳에 활용하여 브랜드의 정체성을 각인시켰습니다. 오늘날 로고 마케팅의 정석을 만든 인물입니다.
그리고, 샤넬의 상징인 트위드 재킷을 찢거나, 가죽 바지와 매치하고, 힙합 요소와 결합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과거를 존중하되, 그 과거를 파괴해야 한다(솔직히 뭔소리인지 어렵습니다)"라는 철학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받습니다.
패션쇼를 단순한 의류 발표회가 아닌 거대한 '엔터테인먼트'로 격상시켰습니다. 파리 그랑 팔레 안에 실제 크기의 로켓, 인공 폭포, 슈퍼마켓을 지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마케팅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사실, 샤넬은 상장하지 않은 가족 경영 기업으로, 소유주인 알랭 베르트하이머와 제라르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칼 라거펠트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영 전반을 철저하게 도왔습니다.
또한, 사라질 뻔한 프랑스의 전통 공방(단추, 깃털, 자수 등)들을 대거 인수하여 샤넬만의 독보적인 퀄리티를 유지하는 공급망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현재의 샤넬은, 명품 업계의 폐쇄성을 깨고 인사 관리와 조직 문화 전문가를 경영인으로 영입했습니다. 이는 디지털 전환, ESG 경영(지속 가능성), 그리고 전 세계 매장의 경험을 표준화하려는 현대적인 경영 혁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럭셔리 브랜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리더들의 혁신적인 마인드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드네요. 골프도 기계적인 스윙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고 감을 중요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골프스윙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수만큼 많으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항상 다시 도약하고 혁신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각자가 럭셔리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굿샷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