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무료함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심심해, 뭔가 재밌는 걸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
물론 어릴 때 미쳐 살았던 게임이나.
지금도 여전히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영화, 예능, 웹소설 등의 콘텐츠.
그런 것들이 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모든 콘텐츠는 끝이 있고, 다 소비한 후에는 더 소비할 게 없다.
쉬면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런 콘텐츠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퇴사할 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회에서 나왔으니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해야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도 참아야 한다.
그런 말을 듣기도 했고, 실제로 내가 생각하기도 했는데.
몇 년은 충분히 살만한 돈을 모으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하기 싫은 거 안 해도 몇 년은 거뜬하겠는데?
그렇게 몇 년을 소비만 하며 산 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살고 싶으면 일하러 뛰쳐나가지 않을까?
일단은 나중 문제였다.
매일 소비만 하는 헤비 소비러한테 세상의 콘텐츠는 가뭄 수준으로 부족하다.
취향이 아닌 걸 거르고 나면 볼 수 있는 게 현저히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칩거 초반에는 웹소설을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볼 게 꽤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매일 매시간 눈 떴을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주구장창 보면 깡그리 사라지기 마련.
매일 여러 채널의 신작이 쏟아지지만 그중에 내 취향 포인트 안에 드는 건 드물었다.
결국 내 오아시스는 메말라 버렸고 침대에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이렇게 무료하고 재미없게 있을 수는 없는데.
뭔가 하고 싶긴 한데, 정작 명확하게 하고 싶은 건 또 없다.
뭐든 재밌는 걸 보고 싶은데, 내가 아는 재밌는 건 다 봤다.
이럴 바에야 나가서 뭐든 일이라도 해서 돈이라도 버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잠깐. 아주아주 잠깐 스쳤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제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만 먹는 이 삶에 너무 익숙해졌다.
남이 필요로 하는 시간에 일어나서.
돈 벌어야 하니 억지로 주어진 일을 해내고.
다음 날 일어날 시간을 위해 일찍 잠이 들고.
그런 삶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났다.
더 정확하게는 굳이 지금 꼭 그래야 할 만큼 돈이 궁하지 않았다.
돈 벌려고 그 싫은 거 힘든 거 다 참고 하는 건데.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야 그거 견디고 참을 이유가 없지.
어디 잠깐 알바라도 갈까 하다가도 그럴 거면 퇴사를 안 했어야지, 란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 회사에서 나는 능력을 꽤 인정받기도 했고.
일이 매우 편하기도 했으며, 연봉도 하는 일에 비해 많았다.
그런 일도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알바? 안 되지.
그래서 이제 할 게 없는데 뭘 해야 할까?
이대로는 너무 심심해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
평소에 배워보고 싶었던 걸 한 번 배우러 가볼까?
뭐가 있었지?
그림? 음악? 운동?
잠깐 검색하다가 곧 관뒀다.
뭘 하든 오가야 할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한두 번이면 모를까 계속해서 그걸 지킬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거기에 돈을 쓰면 그만큼 내가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정말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신중하게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생각나는 모든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그럼에도 나는 시간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뭔가를 해야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도 하릴없이 유튜브를 떠돌았고.
전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치워냈던 콘텐츠들을 다시 소환했다.
그중 몇 가지는 아주 약간만 견뎌내면 봐줄 만했다.
가뭄에 콩 나듯 내 취향에 맞는 새 콘텐츠가 나타났고.
나오자마자 금세 소비해 사라졌다.
인기 있다는 콘텐츠는 취향이 아니라도 발이라도 한 번 담가봤고.
놀랍게도 대부분은 재밌었다.
짧게 축약하자면 놀고먹고 쉬기만 하는 짐승 같은 삶이었지만, 나름의 치열함은 있었다.
배부른 소리지만.
물론 재밌는 소비를 하고, 무료함을 견디는 것 외에도 이따금 내 마음에 찾아오는 침입자가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남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먹고 자고 싸고 있는 돈 축내기만 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어?
어느 날은 불안했고.
또 어떤 날은 걱정됐지만.
그 모든 걸 다 합쳐도 지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그 삶에도 의미는 없었으니까.
돈을 벌어서 쓰긴 했지만, 그래서 통장 잔액은 조금씩 늘긴 했지만.
그때도 이렇게 힘들게 버티면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했었다.
돈만 있으면, 이것저것 관심 있는 거 배우러 다니면서 재밌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주 약간의 돈이 있어 잠시 노동에서 해방된 지금.
뭔가를 배우러 다니기에는 돈이 부족하고, 딱히 그렇게까지 간절히 배우고 싶은 건 또 없고.
재밌게 살기에는 재밌는 게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냥 숨만 쉬며 살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