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만 해도 오는 번아웃

by 이백구십일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내 에너지 레벨은 꽤 오랫동안 낮았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다.

퇴근하고 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누군 운동을 하고 누군 학원에 가고 배우고 한다는데.

갓생이 유행처럼 번지다가 이제는 생활로 정착된 것 같기도 한데.

난 뭐, 별로 하는 것도 없으면 왜 이렇게 힘들고 피곤하지?


증상만 봐서는 번아웃인데.

나처럼 별로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번아웃일 수가 있나?

태운 것도 없는데 다 탔다는 게 말이 돼?


퇴사를 고민하던 무렵에 이런 생각들을 했다.

번아웃이고 뭐고 잘 모르겠고.

일단 그냥 하기 싫은 거 안 하고, 힘든 거 안 하고 쭉 쉬고 싶으니까 쉬자.

그렇게 늘어지게 쉰 후에도 나는 별로 회복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한 것도 없으면서 계속 쉬고 싶을까?

뭐 때문에 이렇게 지치고 낡아 버렸나.

쉬는데 왜 이렇게 쉰 것 같지가 않지?


그런 고민으로 온종일 가슴이 콱 막힌 것 같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재밌는 콘텐츠들로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AI를 통해 웹소설에 집착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처럼.

지금 내 상태에 대한 것도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AI를 괴롭혀 보기도 했다.

이번엔 말이 지지리도 안 통했다.

하는 답변 족족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덤벼들어 기계랑 혼자 싸우는 섀도 복서가 되기도 했다.


신경질이 나서 채팅 기록을 지우고 조금 후.

이성을 돌아오자 AI가 했던 말이 제대로 된 답이었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이런 걸까, 어떻게 벗어나야 해?

그렇게 질문한 내 말에 AI는 이렇게 답했다.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최대한 보존하면서 버티세요.]


그렇게 버티기만 하면 인생 끝나?

여태 그러고 살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또 그러고 살라고?


[에너지 소모가 적지만, 그래도 한 후에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활동은 없었나요?]


아니,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에너지 소모만 된다는 거잖아.

아무리 적은 소모라도 소모되기만 하면 대체 언제 회복해?


대충 이런 흐름이었다.

내가 원하는 답은 당장 다시 나를 일으키고, 회복시켜 줄 황금 열쇠였는데.

싫어하는 일은 안 하겠다.

그런 선언을 해둔 탓인지, AI 답변은 계속 빙글빙글 맴돌기만 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정한 조건 안에서 최선은 결국 그나마 편히 쉬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었다.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러면 결국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쉬어야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는 나한테 딱 맞고 필요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그것 좀 알려 줘. 난 그걸 알고 싶어.

답 없는 질문에 없는 답을 들려준 건데, 화풀이만 열심히 한 꼴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 글을 통해, 원했던 답은 아니지만 다른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왜 번아웃된 것 같은 느낌이 났을까?

글에는 번아웃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적혀 있었다.


흔히들 번아웃이 갓생 사는 사람들한테만 온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래서 나는 그냥 일상을 살고 있었을 뿐인데, 번아웃 증상이 찾아오면 왜 이러지? 이상하다.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번아웃으로 바로 연결 짓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후에야 이게 번아웃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대체 왜 번아웃이지?

그렇게 생각한다고.


정확히 내 증상과 같았다.

대부분의 인터넷 글은 어그로만 끌고 정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도 내가 본 글에는 답도 함께 달려 있었다.


번아웃이란 건 노력에 대한 성과가 없을 때 온다고 한다.

고생은 했는데, 보상받지 못했을 때.

혹은 그 보상이 미약할 때.


그렇게 보니 내가 번아웃이 된 게 이해가 됐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 생활은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어졌는데.

돈이 모여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당장 몇 년은 돈을 벌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됐다.

회사에서 주는 돈이라는 보상의 가치가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있는 시간의 가치도 낮아졌다.


그런데도 출근을 해야 했고,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된 거다.

원인을 알게 되니 조금 속이 시원하긴 했는데.

아주 잠깐이었다.

그래서 뭐, 원인만 알면 문제가 해결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잖아.


불퉁한 마음이 들었지만, 글에는 번아웃을 벗어나는 법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냥 무작정 쉬기만 하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줄 아는데.

그냥 쉬기만 하면 소모가 없을 뿐 뭔가 더 채워지진 않는다고 했다.


오, 맞아.

내가 딱 그래!

드디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기대로 해결법을 읽었다.


에너지를 채우는 법.

그래서 그게 뭔데?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거였지만,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다들 하나쯤 아무리 피곤해도 하고 싶은 일.

언제든 하기만 하면 즐겁고 신나는 일.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걸 하세요.

라고만 되어 있었다.


난 그런 게 없는데?

글은 이미 무정하게 끝나 있었다.


대체 사람들은 뭘 하면서 에너지를 채울까?

누군가는 여행이라고 하고.

누군 또 호캉스라고 하고.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한창 유행처럼 여행, 호캉스가 번질 때.

진짜 그렇게 좋나?

하고 해 본 결과 피곤하고 무료하기만 하고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난 이미 그것들이 나와 안 맞다는 걸 확인했다.


결국 또 똑같은 자리였다.

번아웃을 벗어나려면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활동을 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었고, 그걸 발견하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다들 하나쯤은 있는 거란다.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난 뭐, 돌연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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